임시방편 땜질 정책 아닌 산업의 체질 개선이 해답
‘헐벗고 주린 백성의 고혈(膏血)을 빨아 국가 재정을 세우니….’
흔히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상황에서 ‘고혈’을 쥐어짠다는 말을 쓰곤 한다. 얼마 전 자유한국당 엄용수 국회의원은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근로자의 최저임금법 적용을 제외하는 내용의 개정 법안을 발의했다.
타지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고된 노동도 마다않는 그들도 누군가의 가족이며, 인류의 구성원 중 한명이다. 개정안은 그들의 고혈을 빨아 우리만 잘 살겠다는 이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굳이 이런 감정 섞인 ‘인류애(人類愛)’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타인의 희생이 수반되어야만 수익을 창출하는 산업은 정상이 아닐뿐더러, 문제해결의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도 없다.
힘없는 외국인 근로자의 임금을 쥐어짤 게 아니라, 국회의원 임금을 최저임금 수준으로 삭감해 농업 발전에 보탠다면 더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겠다. 자신들의 기득권은 절대로 내려놓지 않고, 힘없는 약자들만 쥐어짜는 습성은 언제쯤 바뀌려나 모르겠다. 올해 여름 최악의 폭염에도 노동의 현장을 지킨 건 국회의원이 아니라 외국인 근로자였다. 힘없는 그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건 인권을 존중하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기조와도 대치된다.
문제의 핵심은 농업을 대하는 정부와 국가의 태도 변화다. 그간 한국경제는 통상협상에서 농업을 희생시켜 수출위주의 경제성장 정책을 펼쳐왔다. 결과만 놓고 보면 농업인의 삶은 더 퍽퍽해졌고, 농가소득(3823만원)은 도시근로자가구 소득의 60% 수준으로 추락했다.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과 양극화는 갈수록 심화되는 모양새다.
당연하게도 청년층의 탈 농촌화 현상은 가속화되고, 출산률은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농촌지역은 하나 둘 유령도시로 전락해가고 있다. 애정을 갖고 살아온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의 심정도 오죽하랴. 얼마나 삶이 퍽퍽하면 연고도 없는 삭막한 도시로 떠나겠는가.
근본적인 해법은 농업을 대하는 정부와 국민들의 의식전환, 그와 동시에 과감한 투자와 정책적 지원이 이뤄져야한다. ‘스마트팜’, ‘스마트농업’ 참, 말은 그럴듯하다. 그런데, 수익은? 그래서 농민들의 삶은 질은 높아졌으며, 소득은 증가했는지 정부에 되묻고 싶다.
남재철 기상청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한반도의 평균기온이 21세기 후반에 가면 지금보다 4.7도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동시에 올해 겨울은 매서운 한파가 몰아닥칠 수 있다고 예고했다. 이러한 이상기후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며, 이상기후에 따른 작황 불안정으로 전 세계적으로 곡물과 채소가격은 급등했다.
지금과 같이 농업을 멸시하는 정책이 이어진다면 한국의 식량안보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곡물 자급률은 1960년 90%에서 20%대로 추락했다. 즉 국내에서 소비되는 쌀과 밀, 사료용 곡물의 80%는 수입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반면 전 세계 평균 곡물자급률은 102.5%로 한국의 식량안보는 매우 불안한 상황이다.
실제로 한국식량안보재단은 지난해 잦은 기상이변과 후진국의 인구증가로 식량위기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지금은 국제곡물가격과 해외 농산물 가격이 저렴한 편이지만 언제라도 국제곡물 가격은 급등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식량이 ‘무기’가 될 수 있는 건 자명한 현실이다.
농업의 가치를 경제논리로만 따져선 곤란하다. 농업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존엄성의 측면에서 지원되고, 지속되어야 한다. 휘황찬란한 수식어로 농업의 참된 가치를 퇴색시키지 말고, 조금 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농촌지역이 활기를 찾고, 농민들이 더 나은 삶의 질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진중한 고민을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