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고, 없고, 하고 싶고, 하기 싫고를 솔직하게 말하기
한국 사람들과 한 번쯤 일해 본 미국인 교수들은 한국 학생을 대체로 좋아한다. 상대적으로 빠르고 성실하게 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지도교수님도 나에게 '전형적인' 한국인의 모습을 기대했기에 선발과정에서 나를 낙점했을 수도.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생존과 더불어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가득하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홀홀 단신 유학을 온 (대학원) 유학생들은, 여기서 성공하고 인정받기 위해 바짝 긴장한 채로 새로운 학기를 출발하기도 한다.
"난 내 지도교수님이랑 위클리 미팅 시작하고 OOO, XXX 프로젝트 돌리고 있어. 교수님이 유명한 사람이라 더 잘해야 할 것 같아. 수업도 정신이 없고, 퀄 시험도 요즘 많이 떨어트린다던데 걱정이야. 방학 때 한국도 못 갈 것 같아."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뭔가 바쁘게 잘 지내고 있다를 어필하고 스스로도 뿌듯한 느낌이다. '열심히 사는 것 같아서.'
나에 대한 내 (잠재적) 지도교수의 적당한 기대와 응원, 혹은 조임은 그래도 좀 무리해서라도 내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의 활력소다. 학기 초반은 그런 적당한 설렘과 기대, 걱정과 약간의 불안함으로 정신없이 시작한다. 그래서 일단 좋은 기회로 보이니, Yes, I'm happy to be...로 덥석덥석 일을 맡아 프로젝트를 3-4씩 시작해 본다. 하지만 어느새, 수강하는 수업에 나오는 과제들과 중간고사가 다가온다. 어쩌지?
좀 해봤다고, 선배들은 그렇게 얘기한다. "야 무리하지 말고 그냥 코스웍 대충 하고 네 거 열심히 해." 뭐 그런데 그게 말이 쉽나.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근데 일단 나는 시간관리도 잘 안되고, 힘겹고, 영어도 생각보다 잘 안 늘어서 답답하고, 뒤쳐지는 느낌이고, '어떡하지'만 반복하게 된다.
뭔가 힘들지만 바쁘고 정신없이 지내는 게 뿌듯한 순간도 잠시, 그건 '느낌'이었다. 실제로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물론, 자기 페이스에 맞게 계획을 세우고 시간관리와 운동까지 아주 적절하게 잘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분들은 논외)
"잘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아닐까? 그래야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맞다. 그러나, 지금 내가 보따리 보따리 싸들고 있는 짐들을 앞으로 빠르면 4년 늦으면 6-7년 동안 계속 잘이고 지고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게 좋다.
이미 힘들고 지친다? 그러면 이게 미래에는 좀 더 나아질까? 물론 내 능력은 일취월장(제발... 바라봅니다...) 하겠지만, 나의 일하는 스타일등은 그렇게 쉽게 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자, 일단 열심히 시도하고 시행착오를 겪은 나에게 박수를. 그러나, 계속 이렇게 하다간 아무것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럴 때 눈 딱 감고 I'm afraid... 를 시도해 보자. 바로 '어렵다' 혹은 '거절'을 시도하는 것.
왜 NO를 할 수 있어야 할까? 나의 시간과 능력, 성향을 돌아보지 않고 No 하라는 것은 아니다.
안될 것 같지만, 본인은 이제 막 시작한 시기고 (3-4년 차도 물론... 가능), 이것저것 시도해 보니, 다른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초반의 적응기에는 일단 내 '우선순위'인 코스웍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야 내 공간이 생기니까.
일단, 1) 강의/회의/리딩/라이팅에서 소화하는 영어의 총량이 기존과는 다르기 때문에 소화하고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20대 중 후반의 코호트 들은 20년 넘게 그렇게 살았는데, 내 영어나이는 고작 1살도 안 되는 것.
2) 코스웍은 중요하다. 그것만 소화라는 것은 아니고, 결국 내가 논문을 쓰기 위한 기본적인 초석이기에, 세미나던 강의던 그때 열심히 들어놓아야 페이퍼를 다시 또 읽거나 문제를 다시 풀어보거나 하는 '비효율'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덤은, 세미나 수업 (인문/사회과학/경영 기준)에서 좋은 연구주제를 찾으면 그게 내 연구 파이프라인이 되는 것.
3) 당신은 이미 낯선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밥도, 주변 환경도, 안전도 이제까지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르기에 내가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 요소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이해해 주며, 그걸 이해하지 않고 본인의 일을 하기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나중에도 졸업 후에도 나를 괴롭힐 것이다.
4) 내가 뭘 할 수 있고, 잘할 수 있는지, 뭐가 부족하고 배워야 하는지 깨닫고 알려줘야 일을 시키고 함께하는 지도교수님과 다른 코워커들이 나에게 어떻게 얼마나 일을 시킬 것인지,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서로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편하다. 무조건 된다고 했는데, 마감 기한은 잘 못 지키고 퀄리티가 좋지 않으면 서로 피곤하다.
결국, 나의 일하는 습관과 패턴, 능력과 한계를 파악하고 지금 우선순위에 주목하는 것, 그리고 나의 리듬에 맞춰서 가끔 과부하가 오는 일에 대해 No 할 수 있는 것이 몸과 마음이 평안한 일잘러 대학원생이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일을 함께하고, 시키는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길 바란다. 다 잘할 수 있으면 박사과정/석사과정에 온 이유가 없다. 바로 연구원으로 취직하면 되지. 교수들이나 프로젝트 매니저들도 알고 있다. 똑똑한 사람들은 자기의 공간을 만들면서 일한다. 일례로, 나와 같이 입학한 내 코호트는 주말이면 친구 결혼식에 여행에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도 4년 만에 박사를 마치고 이미 교수가 되었다 (난 아직...). 자기 스케줄, 능력, 일정들을 알고 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쳐내고 내 거를 잘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Tip.
어떤 지시, 요청, 권유 등이 들어왔을 때 처음부터 '못하겠어요' 하면 안 된다. 일단 좋은 생각이라 말하고, 일단 내가 이런저런 상황 (코스웍을 듣고 있고, 지금 하고 있는 다른 프로젝트가 있다거나)에서 아직 좀 능력이 부족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새로운 일을 해보자는 요청일 경우) 제가 좀 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라고 물어보거나, (지시 혹은 요청일 경우) 제가 아직 초반이고 ooo, xxx가 있어서 시간이 좀 더 소요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언제까지 하면 좋을까요? 어디까지 하면 좋을지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식으로 내 공간을 만드는 게 좋다. 그리고 그 나중에 (일단 상대방의 의견을 한 번 경청하고 들었고, 고민했기 때문에) 진짜 못하겠을 때 혹은 마감을 지키지 못할 때 due date보다 미리 "이번에는 제가 좀 부족해서 못하겠습니다 (혹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보자.
그 상황 때문에 남은 내 여생이 바보 같고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 아니다. 몇 번 정도는 부족하고 못할 수도 있다. 당장은 불편할 수 있으나, 상대방도 이런 나를 '저울질' 하며 다음 일을 도모할 것이다. 지금 못하면,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