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컨디셔너 이름이다.
마트에서 샴푸 코너의 판매직원에게 "방금 보고 나온 영화 이름이랑 같아요."라고 말하니, '운명'이라 생각하고 사가라며 권유한다.
판매직원 입장에선 내가 이 컨디셔너를 카트에 담아 가도록, 그저 사명감에 의하여 자기도 모르게 던진 재치있는 말이였겠지만, 방금 본 영화와 꽤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영화가 끝나고도 뭔가 다 마치지 못한 이 미적지근한 마음들은, 방금 집어 든 이 컨디셔너의 이름, 아니 그보다 판매직원의 '운명'이라는 그 한마디로 묘하게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일까.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하고, 필시 그렇게 믿고 있어요!」 라고 말이라도 꺼낼라치면, 나잇값 좀 하라고, 현실인식 좀 하라며, 주변인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어릴 적 달콤하게 이야기하던 운명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턴가 낯 간지러워진 것이 사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슴 한켠의 어딘가에는 내심 달다구리한 것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었는지, 그러나 아닌 척하는 건 아니였는지.
"운명따윈 믿지 않아요." 라는 말이 더 설득력있게 들리는 계절이니까.
그래도 어른이 되어 언급하는 이 '운명'이라는 말에는 어릴 적에 누구나 한번쯤 꿈꾸던 무조건적인 환상과 이상과 같은 것은 아니게 된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운명이라는 말에 하염없이 기대어 가는 것이 취향도 아니거니와, 그저 '자연스럽게 그렇게 오고 가는 것' 을 운명이라고 부르면 어떻겠냐고.
부정도 긍정도 아닌, 그냥 그러한 '흐름' 그 자체를
운명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어디쯤가 생각해 보는 날이 있다. 오늘처럼...
「린스(컨디셔너)가 떨어졌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사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밖에 나가 예정에도 없던 영화를 보았고,
돌아오는 길 떨어진 린스(컨디셔너)를 사러 갔고,
하필이면 오늘따라 본 영화제목도, 고른 제품도
이름이 '이터널 선샤인' 인 하루」
이 우연의 일치가, 방금 보고 나온 영화의 연장선쯤으로 생각되었다.
사실은 우연과 운명이라는 말로
상술에 말리고 있던 것뿐인데.
보기 좋게 낚였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