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장.
추웠던 2 월도 지나가고, 다시 네 개의 계절이 차례로 찾아왔다가 지나갔다. 그러자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던 눈은 이제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고, 들판 여기저기에서 초록색이 올라오는 중이다.
준영은 이제 기본 골격이 거의 갖춰져 가고 있는 5 층 건물을 쳐다보았다. 건물의 비계 위에서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준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진영이 목발을 짚고 서 있고, 그 옆에는 선경이 자그마한 가방을 맨 채 함께였다. 준영은 더 멀리 바라보았다. 나란히 있는 두 채의 하얀 집, 그 앞에 펼쳐져 있는 텃밭에서 두 명의 남녀가 뭔가를 하고 있다.
“선경아, 엄마 아빠는 항상 부지런하셔.”
“오빠, 엄마 아빠는 원래 그랬어.”
“형, 이제 뼈대는 되었고, 콘크리트를 부을 차례인가?”
진영은 목소리가 약간 변했지만, 이제는 제법 말을 잘 했다.
“목소리가 변해서 다행이야. 이제 헷갈리지 않잖아.”
선경이 배시시 웃었다.
준영은 일 년 전 생각이 났다.
준영과 선경과 진영은 시골로 내려와, 자그마한 시골집을 빌렸다. 종환과 순화는 몇 집 떨어진 집을 빌려서 살았다. 그 동안 하얀 집 두 채가 지어지고 있었다. 이제 집도 다 지어져, 며칠 전에 다들 이사를 했다. 집 앞에는 텃밭도 가꾸었다. 종환과 순화는 날마다 여기서 이런저런 야채들을 심었다, 거뒀다 했다. 이런 야채들은 어김없이 식탁에 올랐고, 다섯 명은 매일 모여서 함께 식사를 했다. 진영은 점점 더 좋아졌다. 얼마 안 있으면 목발도 버리고 혼자서 걸을 수 있을 것이다.
현석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미현과 함께 대학에 등록했다. 예전에 못 마친 공부를 마저 하고 싶다는 둘의 마음이 통한 것이다. 사이버 대학에 진학한 현석은 철학을 선택했고, 미현은 생물학을 골랐다. 미현은 의대나 한의대에 가겠다고 열심이었으나, 현석은 그냥 웃기만 했다.
해는 이제 중천에 떠올라, 따사로운 빛을 대지에 함빡 뿌려댔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 그렇다고 외진 곳은 아니었고, 2 차선 도로 하나가 여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도로 저 멀리에서 검은색 승용차 세 대가 나타나더니, 하얀 집 쪽으로 계속 들어왔다. 이것을 본 준영은 진영과 선경을 재촉하여 집으로 향했다.
차들이 멈추었다. 앞 차에서 현석과 미현이 내렸다. 윤영도 함께였다. 그리고 뒷차에서는 진태와 정화 그리고 혜정이 내렸다. 마지막 차에서는 병승과 소희가 나타났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는 준영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태가 트렁크에서 커다란 물건을 내려서 혜정에게로 가져갔다. 혜정은 차 안에서 두 명의 아기들을 내려 유모차에 태웠다. 유모차 지붕으로 햇빛을 가린 다음, 천천히 밀면서 텃밭으로 다가왔다.
종환과 순화가 일어나 사람들을 맞이했다. 종환은 고개를 돌려 준영 쪽을 보았다. 어서 오라고 손을 흔들어댔다.
준영이 앞장서고, 뒤에 진영과 진영을 부축한 선경이 따랐다. 혜정이 유모차를 준영의 앞으로 밀었다. 커버를 올려서 아기들을 준영이 볼 수 있게 했다.
“얘들아, 아빠야.”
혜정의 말에 준영은 유모차 앞에 무릎을 꿇고, 아기들을 들여다 보았다. 파란색 유아복을 똑같이 갖춰입은 두 남자 아이들은 얼굴도 똑같았다. 준영은 한참을 보았다. 그 뒤에서 진영과 선경도 아이들을 보았다.
이윽고 땅에서 일어난 준영은 혜정을 보고, “잘 컸네.” 하고 말했다.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도 봐야지.”
종환과 순화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 앞으로 달려갔다. 손을 뻗어 아기들의 보드라운 얼굴을 만졌다. 둘 다 고사리 손을 내밀며 처음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을 잡으려 했다. 종환과 순화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이 모습을 현석과 미현은 조용히 지켜 보았다.
진영이 앞으로 나섰다.
“이제 형수님이 되셨군요. 축하합니다.”
진영은 혜정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고, 혜정도 같이 인사를 했다. 옆에서 선경이 “언니, 축하해.” 하고 말했다.
“자, 다들 이러지 말고, 집으로 들어들 갑시다.”
진태가 호탕하게 말하자, 이제야 다들 정신이 든 듯 서로서로 챙기며, 집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전부 모였다. 거실 한쪽에 마련된 식탁에, 부부들끼리 그리고 그 옆에 자식들이 앉았다. 병승과 소희가 나란히 앉자, 정화는 며느리될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고, 다들 축하를 보냈다. 그러자 미현은 윤영이 아직도 임자가 없다고 푸념을 했고, 현석은 아직은 괜찮다고 했다. 진영과 선경이 나란히 앉고, 마지막으로 준영과 혜정이 앉았다. 둘 사이에 아기들이 자리를 잡은 것은 당연했다.
집 주인인 순화가 일어나 주방으로 가자, 혜정이 일어나 함께 갔다. 그 뒷모습을 준영이 바라보고 있었다. 윤영과 소희도 거들 것이 없는지 본다면서 주방으로 따라갔고, 선경은 진영을 보았다. 진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경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태는 어서 술부터 가져오라고 큰 소리를 쳤고, 정화는 대낮부터 무슨 술이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진태는, 또 다시, 술은 먹는 건지 마시는 건지 하는 소리를 해댔고, 현석은 그런 진태에게 구박을 주었다.
결국 준영이 일어나,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오고야 말았다.
남자들은 잔을 챙기랴, 숟가락 젓가락을 챙기랴 하고 있고, 주방에서는, 이제 막 쌀을 씻고 있으니, 밥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하고……. 그런 시끌벅적한 소리 속에서도, 유모차에 나란히 앉은 두 아기들은 벙글벙글거리며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태양이 이 모든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며, 아낌없이 그 햇살을 집안으로 부지런히 들여보내 주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식사가 준비되고 모든 이가 자기 자리에 앉자, 혜정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돌리며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었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혜정은 미소를 띤 채 준영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준영이 잡았다. 혜정은 모두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 다음 달에 결혼해요.”
준영은 갑자기 자신이 꿈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행복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준영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어보고,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서 손을 입에 넣었다 뺐다 하는 두 아기의 얼굴을 살며시 만져 보았다. 따뜻하다. 보드랍다. 아기들도 살아 있다. 그리고 모두 살아 있다. 나는 행복하다.
이 세상의 어떤 일도 잘 되었다거나, 또는 잘못 되었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우리는 단지 이 결과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할 뿐이다. 자신과 닮은 그리고 손혜정을 닮은 두 명의 남자 아이들이 그 결과이다. 이제 준영은 이 모든 걸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