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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박국 Aug 15. 2023

모두가 예쁘고 아름다운 시대, 키치가 들려주는 것

아이브의 신곡 제목이 'Kitsch'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 세련된 아이돌로 유명한 아이브가 키치를 노래하다니. 혹시 이번에는 다른 콘셉트를 기대해도 되는 걸까? 안타깝게도(?) 곡은 전혀 키치하지 않았고, 아이브가 다른 팀과 다르다는 걸 강조하는 의미로만 쓰였다. '도둑맞은 가난'처럼 '도둑맞은 키치'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까. 키치에는 저속한 작품, 가짜 등의 뜻이 있다. 누가 봐도 예쁘고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저속하고 가짜인 걸  게 '좋다/나쁘다'의 기준으로 본다면 당연히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예술은 '좋다/나쁘다'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다. 쓰리 코드에 조악한 사운드의 펑크는 그전의 연주력 빼어나고 복잡한 구성으로을 가져 높은 높은 평가를음악적인 평가를  받던 프로그레시브 록이 지배하던 음악 시장을 한순간에 뒤집었다. 앤디 워홀은 순수 예술계에서 저속하다고 말하던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미술관으로 가져왔고, 현대 예술에서 고급과 저속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 됐다.

한국에서도 90년대 홍대 앞, 인디 음악 신의 등장과 함께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음악 잡지에서 연주 실력만으로 늘 독자 투표 1위를 차지하던 H2O의 멤버 강기영과 박현준은 삐삐밴드를 만들어 '문화혁명'이라는 이름과 함께 딸기가 좋다는 구절을 반복하는 노래를 연주했다. 이석원은 연주 실력은 좋지만 자신들의 음악을 하지 않는 헤비메탈 음악가를 PC 통신에서 헐뜯다 결국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자신들만의 곡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황신혜 밴드, 허벅지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 등의 음악, 청년들에게 재발견된 이박사, 패션 브랜드 쌈지의 문화 예술 사업, 일상적인 것에서 모티브를 가져오는 최정화 작가의 작품 그리고 홍익대학교 출신의 여러 미술 작가 등이 시너지를 내며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키치라 부를 만한 움직임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후 키치는 한국 대중음악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싸이월드의 유행과 함께 '시부야-케이' 같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감각적이고 예쁜 음악이 대세로 떠올랐다. 대중음악의 반대편에서 시작한 인디 음악은 '홍대 감성'이란 이름으로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조잡하고 강렬한 이미지의 키치는 선택받지 못했다. 그렇게 키치는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사라지나 싶었지만... '패션 암흑기'라 놀려 댔던 커다란 벨트와 통 큰 바지의 Y2K 패션이 다시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키치 또한 돌아왔다. 

인디 음악이 홍대 앞이라는 장소에서 꽃 피운 것처럼 21세기의 키치 역시 장소와 함께 떠올랐다. 노포와 인쇄소, 야장 호프집 등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 모여 있는 을지로가 바로 그곳이다. 처음에는 공간을 찾던 젊은 예술가들이 저렴한 임대료에 을지로를 찾았다. 그러던 그들은 어느 순간 을지로가 간직해 온 역사와 자신의 예술 세계를 결합하며 새로운 형태의 키치를 만들어 냈다. 사진작가 이윤호와 미술가 이병재가 2015년부터 운영을 시작한 신도시를 시작으로, 신도시의 친구들이 운영하는 우주만물(현재는 문을 닫았다), ACS(전-안철순) 등의 공간이 생기고 여기서 다양한 이벤트가 탄생하며 90년대 홍대 앞이 그랬던 것처럼 을지로는 묘한 활력을 맞으며 소위 '힙지로'로 떠올랐다.


을지로에서 열리는 파티는 케이팝부터 각설이 타령까지 기존 홍대, 강남, 이태원의 세련된 클럽에서는 선택받지 못한 형태의 음악이 플레이됐다. 기존 클럽 음악 마니아는 이게 무슨 음악이냐며 폄하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이는 을지로를 상징하는 사운드로 자리 잡았다. 을지로 사운드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는 중이다. 고속도로 관광버스 메들리에 영향을 받아 실제로 활동하는 뽕짝 계의 거물을 초대해 만든 퓨쳐 관광 메들리는 입소문과 함께 매해 규모를 키우고 있다. 파라솔 모자에 '즐겁다' 티셔츠를 입고 나타나 이정현의 곡부터 뽕짝까지 플레이한 디제이 싯시(SEESEA)의 을지로 스타일 디제잉은 보일러 룸을 통해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을지로 사운드는 실제 체육관에서 열리는 일본 갸루 레슬링 파티, 실제 찜질방에서 찜질복을 입고 즐기는 파티 등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다양한 형태의 파티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 여기에 정점을 찍은 건 2022년 발매된 250의 앨범 <뽕>이다.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경멸에 가까운 표현으로 쓰였던 '뽕'을 가져와 21세기의 일렉트로닉 음악으로 재탄생 시킨 250의 <뽕>은 한국대중음악상 4관왕을 수상했다. 한국뿐 아니라 '와이어(The Wire), 가디언(The Guardian) 등에 소개되는 등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250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그동안 부끄럽게 '뽕'의 감수성을 끄집어내 그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들려줬다.

다시 부활한 21세기의 키치 열풍은 어디까지 갈까?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일궈 '백년가게'로 선정된 을지OB베어는 기업형 호프집에 밀려 결국 43년 만에 쫓겨나야 했다. 한국 평양냉면의 성지 을지면옥 역시 세운상가 재개발로 영업을 종료했다. 저렴하고 적은 양도 인쇄할 수 있어 많은 독립 예술가가 찾았던 을지로 인쇄 골목 또한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예쁘고 아름다운 게 넘쳐나는 세상이다.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스노우'를 이용해 보정한 얼굴과 인테리어 좋은 카페 사진 등으로 가득하다. 키치가 다시 유행하는 건 그런 세상을 향한 작은 반항일 것이다. 모두가 예쁘고 아름다울 순 없다. 그런 면에서 키치는 있는 그대로 존재를 긍정하는 예술이기도 하다. 모쪼록 세상의 많은 키치가 더 오래 우리 곁에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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