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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a Rosa Kwon Oct 22. 2018

[Camino] 4.(1) 걷다가 문득 불안함이 들 때

길 위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지표가 된다

20170305. Day 4 론세스바예스 > 주비리 (6h 30m, 21.8km)


론세스바예스는 현대식으로 개조한 좋은 알베르게가 있다는 사실로 유명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겨울철에는 오픈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주 오래된 시설에서 자야했다. 사다리와 난간이 없는 옛날식 2층 침대의 첫 인상은 경악 그 자체였다. 대체 2층에는 어떻게 올라가는가. 그리고 자다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그래도 나는 일찍 도착한 덕분에 1층 침대를 얼른 차지할 수 있었고,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알베르게마다 샤워부스는 천차만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옷가지를 걸어두고 빠르게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도착하고 있었다. 가방 둘 곳 없이 빽빽한 침대의 간격,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의 큰 이야기 소리 때문에 하루종일 느꼈던 평온은 온데간데 없고 나는 극도로 피곤해졌다. 결국 6시도 안되었을 무렵, 귀에 이어플러그를 야무지게 꽂고 잠이 들어버렸다.


자고 일어나서 핸드폰 시계를 보니 아직 온 사방이 어두컴컴한 새벽 4시였다. 오늘은 다시 잠들지 않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짐을 챙겨 로비로 나갔다.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끼익끼익 소리가 나는 아주 오래된 대형 나무문이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오늘 지나가게 될 마을들을 살폈다. 눈, 비, 진눈깨비가 온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배낭에 커버를 씌우고 판초우의를 뒤집어 써야했다. 이것은 핸드폰을 꺼내기도 불편하고 중간중간 쉬어가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도를 못볼테니 최대한 마을 이름들와 마을 간 간격을 숙지하는게 좋은 선택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 짐을 챙기러 나올 때쯤 나는 이미 준비를 마쳤다. 어디 길에서 혹여 무슨 사고가 있더라도 금방 눈에 띌 수 있게 형광 노랑(혹은 연두?)색 판초우의를 사왔다. 만약 내가 조난당한다면 누군가 빨리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듬뿍 담긴 색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첫 날 생장피드포르에서 만났던 한국인 A오빠도 같은 우의를 입고 있었다. 가성비가 좋아 인터넷에서 같은 것을 주문했단다. 판초우의를 입으니까 생각보다 훨씬 따뜻했다. 진흙이나 작은 돌이 신발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스패츠까지 착용하고 심호흡을 하는데 사람들이 물었다. “아니, 한국에서 등산동아리 하다 왔어? 장비가 왜이렇게 많아?”


아직 동이 트지 않은 6시 30분. 부지런을 떨며 출발하려고 밖으로 나왔더니 차도와 카미노 모두 칠흑같은 어둠 속에 묻혀있었다. 가로등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1m앞도 안 보일 수가 있나? 헤드랜턴이 있어도 위험할 판인데 내가 가져온 것은 손바닥에 쏙 들어올정도로 작은 미니 손전등이었고 이런 날씨에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어서 50m정도 가다가 결국 벌벌 떨며 되돌아왔다. 위험한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수도없이 다짐했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해가 뜰 때까지 꼬박 한 시간을 더 기다려 7시 40분쯤 알베르게를 출발했다.


스패츠 착용하고 판초우의 입은 채로 걷는 나. 왼쪽은 차도, 오른쪽은 카미노. 표지판은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790km)를 알려준다.


날씨가 궂으니 어제처럼 차도로 갈까 싶었지만, 카미노의 상태가 썩 나쁘지 않아보였다. 우선 3km정도만 카미노로 가보고 다음 마을에서 차도로 가면 되지 뭐! 라고 생각했는데, 카미노가 정말 아름다워 하루종일 이 길을 따라 걸었다. 오솔길을 지나, 외양간을 지나, 개울을 건너고, 여러 개의 문을 계속해서 통과하는 길이었다. 진눈깨비와 우박 비슷한 것을 맞으면서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조개무늬가 그려진 지표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아무 표시가 없다면 보통은 직진해야 하고, 갈래길에서는 반드시 어디에든 지표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보도블럭에도, 이정표에도, 나무에도, 작은 석조물에도 나타나기 때문에 두 눈 크게 뜨고 항상 잘 살펴야한다.


처음에는 핸드폰 지도를 사용하지 않는다는게 불안했다. 하지만 지도와 핸드폰이 없어도 1천년 넘게 다녔던 길임을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 지표를 찾는 일이 쏠쏠해질 때쯤 신기루처럼 헛것을 보기도 했다. 멀리서 보기엔 지표같았는데 가까이 가보니 아무것도 없다거나 파란색 실만 덩그러니 있는 경우였다. 그래도 앞서 걸어간 순례자의 발자국이 눈밭에 남아있어서 한번도 길을 잃지 않았다. 길 위에서 이렇게 순례자들은 서로의 지표가 되어주기도 했다.


문과 문을 통과하는 길. 알고보니 사유지여서 문을 달아놓았다고.


6.5km정도 걸어서 도착한 Espinal 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바짝 힘을 냈다. 그런데 웬걸, 일요일이기 때문인지 혹은 이른 아침이기 때문인지 문 연 식당이 하나도 없었다. 잔뜩 기대했다가 조금 실망해서 계속 카미노를 갈까, 그냥 이쯤에서 차도로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나와 같은 판초우의를 입은 A오빠가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카미노를 함께 걸으면서 4.8km 뒤에 나올 다음 마을의 바에서 브런치를 먹자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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