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개월 아기와의 일상 루틴
최근에 어떤 책의 재미있는 타이틀을 보았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라는 하완 작가님의 책이었는데 그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책의 이름이 인상이 깊어서 내 뇌리에 꽤 깊게 박혔다.
그리곤 오늘 오후, 아침 7시부터 일어난 아기와 오전 내내 사투를 한 뒤에 낮잠을 재우고 나서 진이 빠진 채로 침대 위에 철푸덕 엎져있었다. 그때 그 책의 제목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곤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니?'
전업주부가 된 지 2년이 지났다. 그 전에는 한국의 IT회사에서 PM으로 일했었다. 사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직장생활을 한 것도 아니었고 어쩌면 결혼을 핑계로 슬슬 지겨워질 뻔한 회사생활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미국에서 주부로 결혼생활을 하면서 (내 전 글들에서 숱하게 이야기했듯이) 나는 내가 가지지 않은 것, 즉 직장생활을 다시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비자가 없을 때부터, 임신, 출산, 육아의 그 터널을 지나면서도 (지금도 여전히 지나고 있는 중이지만) 언젠가 다시 일할 날들을 꿈꾸며 조용하게 내 미래를 그려왔더랬다. 그러다 보니 아기를 키우고 있는 전업주부인 내 삶이 주부도, 직장인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삶이 되어 벌써 2년 동안 굴러다녀오고 있다니 참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 아기가 잠자는 두 시간 남짓의 지금의 이 시간은 오롯이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아침에는 남편이 더 일찍 일어나서 아기를 보지만, 그 이후 내가 일어나서 아기와 인사를 하고, 기저귀를 간다던지 물을 준다 던 지 하는 그런 내 손길이 필요한 자그마한 일들을 한 이후에 보통의 아침이면 부리나케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이것은 사실 남편보다는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다. 회사에서 아침을 제공하는 덕분에 내가 차려주지 않아도 괜찮지만 해외에서의 아침식사가 어떻게 나오는지 아는지라, 최대한 든든하게 국과 반찬들을 포함한 '한국식 아침식사'를 차려 함께 식사한다. 그래서 출근 시간 내에 이런 것들을 준비하다 보니 나에겐 아침이 가장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바쁜 시간이다. 어제 아침에는 아기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자, 그럼 이제 달려볼까?'라고 스스로 이야기하며 부엌으로 향했다니깐.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남편이 출근함과 거의 동시에 설거지와 18개월 아기를 돌보는 것을 함께 한다. 가끔은 아기를 한 손에 안고 혹은 내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아기를 쓰다듬으며 주방을 정리한다. 그럴 때마다 아기의 징징대는 소리는 거의 일상의 루틴 같은 배경음악이 되었다. 까꿍놀이, 잡고 도망치는 놀이, 책 읽어주기 등을 하다가 아기가 일어난 지 4시간쯤 되어갈 무렵이면 아이패드를 든다. "콩순이 볼 사람~?"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할 것 같은 기세로 손을 들며 "네~" 하고 대답하고는 부리나케 거실의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간다. 내가 아기에게 동영상을 보여주는 엄마가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어서 가끔은 부모로서의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때 평화가 찾아오고 나는 일어나서 처음으로 한숨을 돌린다. 삼십 분의 자유시간 이후에 드디어 아기를 재우는 시간이다. 아기를 재운다는 것은 엄청난 노하우와 숙련된 스킬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매일 18개월 동안 했어도 도무지 아기 재우는 능력은 늘지 않는다. 토닥이는 손을 떼면 어떻게 알고 일어나서 내 손을 자기 배에 갖다 대는 아기 덕분에 이제는 눈 감고 반쯤 자면서도 토닥일 수 있다. 그래도 삼사십 분 동안 그렇게 이불 위에서 어쨌든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아기는 잔다. 결국엔 잘 거면서 왜 이렇게 힘들게 자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기를 재우고 운 좋게 내가 함께 자지 않았을 때면 조용히 방에서 나와 (가지 못했던) 화장실도 가고,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고, 잠옷을 벗고 일상 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나선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곤 '언젠가 맞닥뜨릴' 취업준비를 한다. 영어로 된 유튜브를 찾아 듣고, 내 경력을 영어로 번역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디자인 작업도 한다. 피곤한 상태에서도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재미가 붙고, 내가 꿈꾸는 내 미래의 모습에 대해서 한 발자국 내딛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러다가 '엄마~' 하는 아기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내 문을 열고 나와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리곤 다시 2차전 시작이다. 이제는 아기가 저녁 9시에 잠들기 전까지는 달려야 한다. 그래서 낮에 아기의 낮잠시간이 더 꿀같이 느껴지는 걸 거다.
평소에 이런 삶을 살다가 오늘 정신이 말짱한 채로 어떠한 신체적인 움직임 없이 눈을 깜박이며 침대에 엎드렸다. 와. 좋다..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나지막이 '피곤하다..' 하고 말해본다. 내 목소리가 내 귀에 와서 울린다. 아기에게 하는 높은 음의, 마치 딩동댕 유치원이나 그런 프로그램에 나오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말하는 듯한 얇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아니라 내가 28년 동안 들어왔던 내 목소리다. 그러면서도 '포트폴리오 만들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날 사로잡는다.
직장을 다닐 때를 돌아보면 하루에 정해진 시간 동안 딱 일하고 그 이후에는 일부로라도 일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고,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되었었다. 그렇게 9-6의 삶을 살아도 (실제로는 우리 회사는 9:30-6:30 이긴 했지만.) 이렇게 사는 지금보다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고, 한 달에 한 번씩은 한 달 동안 내 일용할 양식을 책임질 수 있는 돈이 통장에 날아와 꽂혔다. '너 잘하고 있네' 하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퇴근 이후 저녁에는 강남역 주변에서 예쁜 카페, 힙한 밥집에 가서 친구들과 만나 너네 회사, 우리 회사 이야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는 얘기도 했었다. 물론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커피 한 잔 들고 하는 수다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재미있었다. 지금의 내 삶에 비춰보자면 나는 그때 지금보다 덜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가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더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거다. 적어도 회사 다니면서 화장실도 못 가고 머리 감을 시간도 없진 않았으니깐 말이다.
눈을 뜬 상태로 침대에서 엎드려 있다가 무언가 할 것이 없을까 하고 핸드폰을 열고 심심할 때면 열어보는 옷 브랜드 쇼핑앱을 켰다. (자랏간이라고 하는..)
'쌀쌀해진 요즘 날씨에 편하게 입을만한 긴팔티가 없었는데, 그걸 사면되겠다. 사는 김에 셔츠도 하나 살까?'
그리곤 뭐가 되었든지 꼭 살 요량으로 사이즈며, 옷 디자인이며 하나하나 따져보며 카트에 넣고 있는데 갑자기 이것도 열심히 하는 내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 핸드폰을 침대 위에 뒤집어 내려놓았다.
'아니, 아침도 열심히 만들어, 아기도 하루 종일 봐, 영어 공부랑 요즘 시작한 독일어 공부 (스위스에서 쓰는 일상 언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작했다.)도 종종 하고, 언젠가 있을 취업도 틈틈이 준비하는데 이깟 쇼핑까지 이렇게 열심히 할 일이란 말이야?'
사실 어제 남편이랑 사소한 감정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어제의 늦은 저녁에 나와 (나와 비슷한) 남편은 서로의 말과 감정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상태를 풀어내려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둘 모두 오늘 아침에는 평소보다 피곤하다며 눈을 전보다 한 차례씩 더 비벼댔다. 부부싸움까지, 별걸 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스스로가 웃겨서 가끔은 그냥 대충 넘겨버리고, '에라, 나는 모르겠다~' 하고 싶은데 이것도 어려우니 대충 넘길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하나 싶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