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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삶 Mar 08. 2021

시간만 잡아먹는 쓸모없는 취미를 가졌다.

뜨린이(뜨개질 어린이)가 되고 나서..

작년 말이었다. 스위스에서 2년 정도를 코비드와 함께 집 안에서 세 가족이 아둥바둥 보내다가 남편이 말했다. "이럴 거면(= 스위스에서 사는 것처럼 지낼 수 없을 거면), 부모님도 뵐 겸 한국에 잠깐 다녀오자." 한국을 떠나온 후로 항상 내 나라와 내 언어 쓰는 사람들을 그리워했던 나는 내심 기뻤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덤덤하게 반응했다. "어차피 스위스에서도 집에만 있는 생활인데, 한국 가는 것도 좋은 생각이지."


그렇게 2년 만에 우리는 그리웠던 한국에 갔다. 2주의 엄격한 격리기간을 지나고 나니 신세계가 펼쳐졌다. 그동안 아이를 영상통화로만 봐 오셨던 부모님들께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아이와 놀아주시기 시작하셨고, 어느새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던, 곧 세 돌을 바라보는 우리 아이는 부모인 우리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만 졸졸졸 따라다니며 사랑의 몸짓, 행복의 표정, 귀여운 말들을 연신 뿜어내는, (내 동생들의 말에 의하면) 그야말로 집안의 귀염둥이가 되었다.


아침에 눈 떴을 때부터 시작해서 저녁에 잠에 드는 순간까지 (물론 새벽에 아기가 잠이 깨면 그 날은 새벽 육아 당첨이다.) 육아에 옭아매어져(?) 있던 우리 부부에게 아이와 놀아주는 사람도 있고, 단 돈 만 원, 이 만원으로 식사 준비를 포함한 모든 과정의 수고로움을 대신할 수 있는 한국생활은 그야말로 꿀...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이 꿀이었다. 그동안의 외로웠고 지친 해외생활을 촉촉이 적셔주는 단비 같았달까... 뭐라 표현해도 그보다 훨씬 좋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에서 갖기 힘든 내 자유로운 시간. 침대에서 누워있든, 소파에서 널브러져 있든, 누구도 뭐라 하지도 않고 해야 할 일도 없는 여유로운 시간들을 갖게 되니 자연스레 이 시간들을 어떻게 쓸 수 있을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유투브도 보고, 미드도 보고, 그동안 못 보고 말만 들어왔던 한국영화도 보다가 이상한 알고리즘에 의해 갑자기 보게 된 뜨개질 영상으로, 단지 별로 안 어려워 보인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나는 뜬금없이 (밖에 돌아다니며 한국을 구경하거나 부모님과 대화만 해도 아까운 그 시간에) 뜨개질에 빠지게 되었다.


한국에서 매일 저녁 내 일상이었던 것 : 뜨개질한 컵받침 위에 놓은 차를 마시며 뜨개질하면서 영어 신경 안 쓰고 한국어 자막으로 미드 보기




첫 시작은 패키지로 된 코바늘 가방 뜨기였다. 코바늘과 대바늘이 도대체 무슨 차이인지도 몰랐던 나는, 한 코, 한 코, 가방을 뜨면서 온갖 뜨개 동영상들을 찾아서 따라 했고, 겨우겨우 따라 해서 만들다 보면, 버려둔 실 몇 가닥을 뭉쳐놓은 모양새(그야말로 너무 이상하고 맞나 싶은)였다가 가방 밑판이 되고, 옆 판이되고, 어느새 내가 아는 가방이라는 모양이 갖춰진 (그래도 아직은 좀 희한한) 작품이 되는 것이었다. 아! 실을 꼬아서 이렇게 만들 수 있었다고? 정작 몇십 년 동안 학교에서 온갖 지식들을 배울 때는 느끼지 못했던 뿌듯함의 희열이 뜬금없이 뜨개질에서 느껴졌다니.. 거기에다가 우리 부모님은 결혼해서 외국 살다가 몇 년 만에 온 딸이 하는 일이라면 그게 뭐가 되었든 무조건 칭찬부터 하셨다. 나이 서른이 넘어가지고도 손바닥만 한 것을 뜨개질해서 "짜잔~" 하고 엄마, 아빠께 보여드리면 "아이고.. 우리 딸 손재주도 좋네"부터 시작해서 "그래, 네가 어렸을 때에도 뭐든 만들면.."까지 온갖 칭찬이 나왔던 것도 내가 뜨개질에 열심이었던 원인이라면 원인이겠다. (그저 엄마 아빠가 해주시는 칭찬이라면 뭐든 좋아서..)


저 길쭉한 것이 가방 밑판. 내 시간과 돈을 몽땅 잡아먹은 것의 첫 시작.


그렇게 내 한국 방문의 모든 시간은 뜨개 지식과 작품 활동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가방을 완성하고 나서는 다양한 웹사이트에서 배송시키면 하루 만에 집 문 앞으로 오는, 실 사는 재미까지 더해져서 아기 비니와, 남편 비니, 아기 목도리, 컵 받침대, 첫 뜨개 스웨터, 코바늘 인형과 인형 옷, 그리고 아기 가디건까지 보이는 족족, 따라 하고 싶은 것 족족 만들어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한국 방문 동안 예상치 못한 일로 병원에 일주일 동안 입원했던 적이 있었는데, 입원하면 하루 종일 뜨개질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괜히 신나 했던 때도 있었다. (철없게 그렇게 생각했다가 나중엔 병원 주변엔 절대 안 가겠다고 다짐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일어나 있는 시간 동안 소파에 마치 내가 쿠션이라도 된 것처럼 화장실도 안 가고 처박혀서 뜨개질로 하나, 둘 씩 물건들을 만들어 내면서 나는 한국에서의 시간을 보냈고, 날이면 날마다 집 대문 밖에는 내가 주문한 가지각색의 실들과, 바늘, 여러 부자재들은 또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지, 그런 것들이 박스에 담겨서 놓여있었다. 심지어 그래도 그중에서는 저렴하다고 하는 8만 원어치의 대바늘 세트까지 구매하고는 (바늘 세트 중에서는 정말 싼 거다. 정말루요..)  '아. 이게 한국에서만 끝날 취미는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댁이든, 시가댁이든 어디에서든지 잠깐 시간만 났다 하면 바로 소파에 앉아서 바늘과 실을 가지고 뜨개질하는 날 보면서 남편이 물었다. "뜨개질이 정말 재미있나 봐! 엄청 열심히 하네?! 적성에 맞아?" 아무 생각 없이 정신없이 뜨개질을 하다가 남편의 그 물음에 잠시 동안 생각해봤다. 그러곤 대답했다.

"음.. 시간 때우기에 좋은 것 같아. 근데 하나 만들 때마다 너무 시간도 많이 들고, 막상 실이 비싸서 그거 다 사다 보면, 그냥 돈 주고 사 입는 게 더 싸기도 하고. 이걸로 돈 벌기에도 좀 애매하고 (너무 초보라..), 쓸모없는데 시간 많을 때, 아무 생각 안 하고 싶을 때 하기엔 재밌네."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도 쭈욱- 뜨개질을 열심히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동안 뜨개질처럼 그냥 재미로만 했던 취미가 있었었나? 미드를 봐도 그 안에서 들리는 영어를 하나라도 익히려고 따라 하고, 책을 읽어도 좀 더 도움이 되려는 책을 찾으려 하다가 결국 읽지도 않는 영어 원서를 사기도 하고, 베이킹을 해도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좀 더 잘 보내려는 마음이 있었고, 그동안 시간 아깝다는 핑계로 재미를 붙였던 모바일 게임 하나 없었다. 지금은 하지 않는 운동도 한창 할 때에는 건강을 위한다는 마음이 컸고, 다음에 아기가 크고 나서 함께 하자고 남편과 약속했던 것들도 그런 류였다.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것. 그렇기 때문에 이 많은 것들이 지속되지 않았고, 나중에는 동기를 잃어갔으며 그러다 결국 시간이 남을 때 했던 것은 마땅히 할 것도 없는 핸드폰을 붙잡고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정보들을 대충 쓱 훑어보는 것이었다.


사전에 '취미'를 찾아보면 나오는 설명은 이렇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 현대적 의미의 여가 선용 활동.'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가졌던 취미란 사실 스스로 '시간만 잡아먹고 쓸모없다'라고 여겼던 뜨개질, 이게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굳이 말한다면 자기 계발의 노력? 아무튼 다시 생각해보면 시간만 잡아먹고 쓸모없는 취미를 가졌다는 말 자체가 맞지 않는 말인 것이다. 왜냐면 취미는 특별히 쓸 데가 없어도, 재미가 있어서 지속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제대로 된 취미라고 하니까! (내가 아니라 사전이.) 그래서 난 시간만 많이 잡아먹는, 어디에 쓸 데 없는 뜨개질을, 더 이상 재미를 느끼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할 생각이다.


소셜 네트워크에 내가 뜨개질한 것을 몇 번 올리자 ('안 그래도 겨우 만든 뜨개 작품을 어디에도 쓸데가 없는데, 친구들 보여주면서 자랑이라도 해야지'하는 생각) , 주변의 몇 친구들도 재밌어 보여서 자신도 시작했다며 나보다 더 열심이다. 물어보지 않아도 스스로 뜬 목도리나 귀도리, 모자 사진을 보내주면서 서로 더 열심히 하자고 마구마구 파이팅한다. 별 거 아닌데도 재밌다. 뜨개실과 바늘 이야기를 하면서, 손이 내 손이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 두 시간을 대화한다. 다들 그냥 재미있어서 해보는 뜨개질에 이렇게 진심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1) 조금이라도 덜 뜨려고 크롭탑 뜰 생각.  2) 모자 뜰 수 있도록 서로 용기를 불어놓아 주기.  3) 서로 뜬 거 보여주는 사이



아무튼 종종 뜨개질과 취미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스위스로 돌아와서도 가끔 시간이 좀 비는 날이면 나는 다시 뜨개질바늘을 들고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어본다. 반복되는 뜨기를 하다 보면 부모님 생각, 남편 생각, 지난해 휴가 생각, 날씨 좋아지면 더 신나게 놀아볼 생각 등, 평소라면 굳이 하지 않을 생각들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참 큰 장점이다. 지난주에는 무려 영국에서 실과 바늘을 주문했다. 뜨개질은 시간도 시간이지만 돈도 굉장히 많이 드는 비싼 취미인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재미있으니까 여전히 계속한다. 뜨개질.


"다들 쓸모없어도 진짜 재밌는 취미 하나씩 가져 보는 것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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