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욕의왕 Feb 08. 2016

명절이 싫은 여자

뷸효녀의 명절은 정직 대신 은밀, 다정 대신 봉투

누구에게나 존재만으로 기쁨인 시기가 있습니다. 눈, 코, 입이 어찌나 사랑스러워서. 손가락 발가락이 어찌나 영특해서 엄마 아빠의 자랑이고 흡족함이죠. 잠 잘 자는 게, 밥 잘 먹는 게 효도인 때가 있습니다.
그로부터 이십오 년쯤 지나면 기쁨들은 갖은 방법으로 불효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엄마가 뒷목을 오백천 번 잡을 텐데. 엄마 아빠에게 감춘 수많은 비밀은 제 가장 큰 배려에요. 알아 봤자 혈압, 모르는 게 평화.

설날 아침은 고요했어요. 차례는 지난 주에 미리 다 끝냈고 엄마 아빠는 등산을 갔어요. 저는 모자를 눌러쓰고 붐붐마트 앞 ATM 기계에 다녀왔어요. 회사가 왜 이렇게 밤을 많이 새냐, 고 걱정하시는 엄마 아빠에게 진실이라는 불효 대신 봉투를 드리려고요.
오만 원짜리가 다 떨어진 ATM 기계에서 삼십만 원을 뽑아 둘둘 말아 쥐고 돌아왔어요. 만 원짜리로 뽑기를 잘 했어요. 봉투가 두둑하니까 괜히 많아 보이잖아요. 생기와 젊음, 낙관과 긍정을 써가며 번 돈. 지난 주에 애인한테 소고기 산다고 십오만 원이나 썼는데, 엄마 아빠 봉투에는 십만 원씩밖에 못 넣었어요. 제가 아까 불효녀라고 말했잖아요.

명절의 불효녀는 봉투를 통해 스스로를 기만하고 용서해요. 명절의 엄마 아빠는 봉투를 통해 잠시 망각할 수 있죠. 뜻대로 원하는 대로 안전한 길로 가지 않는 딸내미, 해외여행 보내주는 친구의 아들딸, 부모에게 순종했던 과거의 자신을요.

-
엄마 봉투 십만원

아빠 봉투 십만원

여동생 봉투 오만원

남동생 봉투 오만원

작가의 이전글 파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