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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욕의왕 Feb 15. 2016

남자와 여자가 두 번 만난 이야기

남자와 여자가 세 번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남자와 여자가 첫 번째로 만나는 날, 여자는 신촌역 삼 번 출구의 맥도날드에서 기다렸습니다. 여자는 종종 그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어떤 날에는 누군가가 여자를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 날은 여자가 기다릴 차례였고, 곧 남자가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영업상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눈은 남자의 어깨에 가 있었습니다. 남자의 머리를 감싸기도 했을 후드는, 그의 배낭끈에 애처롭게 깔려 있었습니다. 친한 사이였다면 '으휴, 오빠!' 하면서 빼 주었을 테지만, 처음 만나는 남자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순 없었으니까요. 후드의 안쓰러운 눈빛을 여자는 애써 모른 척 했습니다.

탐앤탐스에 들어가서야, 남자의 후드는 결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커피를 가운데에 두고 둘은 이야기했습니다. 남자는 소문난 ‘미드’ 광이었습니다. 얼만큼 미드광이었냐 하면 ‘섹스앤더시티’까지 보았다고, 남자는 자랑스레 이야기했습니다. 여자 역시, 가족이 모두 잠든 새벽 한 시에 온스타일에서 틀어주던 섹스앤더시티를 보며 자랐습니다. 캐리와 사만다 언니의 사연으로 연애를 상상하던 고등학생이었죠. 뉴욕의 섹스앤더시티에서부터, 라스베이거스의 CSI까지. 둘의 대화는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했습니다. 남자는 촉망받는 공학도였고, 여자는 ‘빅뱅이론’이라는 미드를 떠올렸습니다. 주변의 공대 다니는 오빠들은 한결같이 그 시트콤을 찬양했으니까요. 오빠, 혹시 빅뱅이론 보셨어요? 남자의 심장이 뛰었습니다. 그거 가장 좋아하는 미드였거든요. 게다가 시그마가 싫어 눈물까지 흘렸던, 과학에 무지한 여자로부터 빅뱅이론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반가움은 쫓기듯 입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아, 빅뱅이론 ‘존나’ 재밌어요!

여자는 친구들과 이야기 할 때 곧잘 ‘존나’를 썼습니다. 남자는 두말할 것도 없었고요. ‘존나’는 두 사람의 혓바닥에, 귀에 낯선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소개팅 자리에서는 꽤 낯선 단어였어요. 명민한 남자였지만, ‘존나’를 내뱉고 나서는 ‘존나’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자의 눈이 커졌다 작아지며 까르르 웃었습니다. 비틀거리는 사슴을 본 하이에나처럼 눈이 반짝였어요. '아, 그 정도로 재미 있으셨어요?' 여자는 잔인하고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남자의 새하얀 머릿속에서 꽃사슴이 비틀비틀, 휘청거렸습니다. '아, 진짜 재밌어요. 진짜, 재미있어요.' ‘존나’는 ‘진짜’로 순화되어 남자의 입술에서 웅얼거렸습니다. 여자는 야속하게도 까르르, 까르르 웃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두 번째로 만났습니다. 영화관이었어요. 후드를 야속하게 결박했던 배낭끈은 이번에 은은하게 빛나는 코발트블루 빛 비로-드 자켓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벨벳 자켓을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올리비아 팔레르모’라는 뉴욕의 소셜라잇. 그녀의 남자친구가 시상식장에 입고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배낭은 매지 않았죠.

둘은 나란히 앉았습니다. 영화 예고편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탕웨이가 나왔습니다. '아, 탕웨이 너무 예뻐요.' 여자가 말했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나는 탕웨이 별로야.' 했습니다. 여자의 눈에 익숙한 장난기가 돌았습니다. '오빠, 색계 보셨죠?' 남자가 말했습니다. '전체를 다 본건 아닌데…' 그 말을 하면서 남자는 앗차 싶었을까요? 여자는 P2P 사이트 검색창에 남자가 쳐 넣었을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아름다운 탕웨이, 그녀 혼자만 나오는 장면은 아마 아니었을거에요. 그는 연이어 앗차, 싶은 컨텐츠들을 앗차, 하는 마음 없이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중국에 세미나를 갔는데, 중국 여자들은 정말로 겨털을 기르더라고!' 여자는 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지만, 밖으로는 짧게 대답했습니다. '아, 네.'

남자와 여자는 세 번째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오래도록 배낭끈에 짓눌린 모자와, 은은하게 빛나던 밤하늘 빛의 비로-드 자켓을 기억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노트북을 켜고 그것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상적인 남자친구의 룩을 보여주는 Jordan Henrion의 블로그에는 백팩을 매어도 좋을 자켓, 배낭끈에 눌릴 모자가 달리지 않은 스웨트 셔츠가 있습니다. 이렇게 귀엽게 입고 있던 남자였다면 이야기의 결말이 달라졌을까요? 세 번째 만남은 존재했을까요? 하지만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날이 다시 차가워지면 그의 비로드 자켓 역시 다시금 햇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햇빛 아래에서 반짝반짝 파랗게 빛나겠지요. 알잖아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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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rdan Henrion을 살 수는 없겠죠?


http://www.lesfreresainsworth.net/
http://les-freres-ainsworth.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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