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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욕의왕 Apr 18. 2016

대수롭지 않아.

호들갑 떨지 않고 비를 털어내요.

비 예보가 있었습니다. 어제 기상캐스터 누나는 조곤조곤하게 퇴근길 중부지방에 비가 온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조밀한 얼굴을 보다 보니 정작 예보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기상캐스터는 미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들 너무합니다. 자꾸만 주의를 흩트려 놓아요.

포털에서 날씨 창을 띄웠습니다. 뭐라도 하나 더 예측하면 좋아하는 세상이라 그런 건지 참 상세하게도 알려줍니다. 바깥 창을 바라볼 이유가 없어요. 요즘 세상의 날씨는 시간 단위로 쪼개져 있어요. 오늘은 오후6시 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 자정까지 온다고 하네요. 뭐, 좋습니다. 몇 시간 후의 여자친구 기분은 몰라도, 언제 비가 오고 그치는지 알면 모든 일이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꼭 신고자 했던 새 운동화가 왜 하필 스웨이드 재질일까요. 혹 빗속을 다니다가 조금씩 비에 젖은 셔츠가 몸에 들러붙을까 봐 벌써 신경이 쓰입니다. 흰 셔츠를 입고 좀 젖으면 섹시해 보이거나 불쌍해서 안아주고 싶다거나 해야 할 텐데 저는 둘 다 아니니까요.

어쨌거나 저는 당황하고 싶지 않습니다. 퇴근길에 비가 좀 왔다고 해서, 미리 대비했던 게 다 소용없어졌다고 해서 호들갑 떨 수는 없습니다. 비는 그냥 좀 튕겨내면 좋지 않을까요. 다 튕겨내고 난 다음 코트의 우아한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있으면 포근함과 묘한 안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곤 실내로 들어가 팔과 어깨 부분을 두, 세 번 털어주면 끝입니다.

때로 기상캐스터 누나의 말과는 달리 비가 안 오더라도, 내가 걱정이 많아 이 ‘비옷’을 입고 나왔다는 사실은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이제 아시겠죠. 속으로는 걱정투성이 일지라도, 늘 대수롭지 않은 척하고 싶은 게 제 마음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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