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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a Mar 17. 2020

헬싱키#4 여행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a piece of Helsinki


2016.08.25. 목요일


오늘은 숙소를 옮기는 날. GLO 호텔은 공원 바로 옆이라 산책하기 좋았고, 룸 컨디션도 기대 이상이었다. 두 번째 숙소가 그에 미치지 못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첫 숙소가 좋았으니 괜찮아. 캐리어를 끌고 중앙역을 지나 골목을 들어서며 친구와 수없이 다짐했다. 그래서일까. 이만하면 훌륭했다.




짐을 대강 정리하고, 서둘러 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친구와 카페에 앉아 한참을 고민했다. 하루 정도 교외로 나가보면 좋겠는데, 어디가 좋을까. 역시 탈린밖에 없는 걸까. 그러던 중 발견한 곳, 바로 '무민월드'. 언제 떠올려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홍콩 디즈니랜드의 후계자로 딱이었다. 무민월드 이야기는 하나도 모르지만 괜찮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몽글거리는, 좋아하는 캐릭터니까. 헬싱키에서 꽤 먼 곳이라 오가려면 꼬박 하루가 걸리지만 괜찮다. 창밖으로 헬싱키 아닌 핀란드를 구경하면 되니까. 마침 유니클로에서 무민 잠옷을 팔고 있어서, 냉큼 챙겨왔다. 그렇게 준비한 무민월드를 가는 거다. 바로 오늘.

나 핀란드에요. 하는 창밖 풍경.


마침내 도착한 무민월드. 하늘이 흐리고, 바람이 싸늘한 것까진 그렇다 쳐도, 이거 뭔가 이상하다. 사람도 없고, 분위기도 썰렁하기 그지없다. 여기가 핀란드에서 손꼽히는 휴양도시 난탈리, 그중에서도 꿈과 환상이 가득한 무민월드 맞나요??


썰렁하다 못해 으스스 한 느낌이 드는 저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던 그제서야 작은 표지판 하나를 발견했다. 거긴 떡하니... 여긴 여름 한 철만 개장하는 테마파크고, 올해는 8월 28일까지라고 적혀있었다. 일단 문을 닫진 않았으니 들어가 보기로 한다. 비만 오지 않길...


문 닫기 3일 전 평일, 테마파크의 현실은 연극이 끝난 무대 세트 같았다. 어디부터 가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 새, 무민이와 친구들이 다가와 포즈를 취한다. 사람 없으니 이것도 좋구나. 무민이 품에 꼭 안겨 그 큰 배 위에 손을 올리고 있으니, 씐씐 에너지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신나게 놀아볼까.


씐씐 에너지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그래서 나름 즐겁게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헬싱키로 향했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바람은 더 쌀쌀하다. 그리고 배도 고프다. (무민월드에 있는 모든 식당이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



좀처럼 해가 지지 않는 곳인데, 도착하니 밖이 깜깜하다. 비도 살짝 흩뿌리고 있다. 춥고 배고프지만, 이곳은 헬싱키. 터미널의 어지간한 식당은 문을 닫았다. 터미널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 멀게만 느껴지는데, 딱히 방법이 없다.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휑하고 추운 길을 절반쯤 걸었을까. 불 켜진 간판을 발견했다. 일식당이다. 순간 뜨끈한 국물이 아른거린다. 메뉴를 가릴 처지도, 생각도 없었다. 그새 문을 닫을까 싶어, 냉큼 들어가 이것저것 시켰다. 일단 따뜻한 국물요리가 필요하니 나베 하나. 우린 배가 고프니까 제일 빨리 나오는 걸로, 가지 요리 하나. 그리고 여긴 헬싱키니까 헬싱키 느낌으로 연어가 들어간 음식 하나.


따뜻한 음식이 속을 채우니, 좀 살 것 같았다. 슬금슬금 느껴지던 한기도 잠잠한 듯했다. 특히 가지 요리는, 금성반점과 더불어 역대급이었다.(볶음이었던가...) 이제 여유가 좀 생겼으니, 맥주잔을 부딪히며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왜 이렇게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걸까. 사람 북적이는 곳은 둘 다 좋아하지 않으니, 썰렁함 때문은 아니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였지만, 그 나름의 재미도 있었다. 날씨 탓이었을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계속 추웠고, 비까지 맞았으니. 그런데 날씨만으로는 설명 안 되는 뭔가가 더 있다. 그게 뭘까.


무슨 일을 하든, 쉼표를 찍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 에너지를 아끼고 한 템포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아니, 내가 아낀다기 보다, 내 몸과 마음이 알아서 "오늘은 더 못 도와주니 알아서 해."라고 일방통보한달까. 그럴 때 방법은 두 가지다. 무리해서 강행하거나, 동조해주거나. 강행할 경우 어김없이 탈이 난다. 못 이기는 척 같이 쉬어주면, 그 다음날은 조금은 가뿐하게 나갈 수 있다. 여행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오늘이 바로 그 순간 아닐까.


그래서 귀한 여행 일정의 하루가 아깝게 날아갔다거나 괜히 그 먼 곳까지 갔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이렇게 보낼 수 없다며, 뭔가 하려고 궁리할 필요도 없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흥 넘치는 거리 공연이 한창이어도 미련 없이 돌아섰다. 지친 하루지만 나름 그 안의 즐거웠던 순간들을 잘 챙겨 넣고, 얼른 숙소로 들어가 푹 쉬어야겠다. 따뜻한 샤워로 몸을 녹이고, 일찍 잠들어야지. 여행은 내일도 계속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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