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 크리스마스가 임박했다는 것을 알리는 여러 사진과 글들이 올라온다. 카페에 가면 캐럴이 나오고 곳곳에 예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져 있다. 어제는 길을 지나가는데 은행 직원들이 산타 모자를 쓰고 고객과 상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또 한 해가 다 갔다는 생각과 함께 이번해도 무사히 지나갔음에 감개무량하기도 하다.
스타벅스에서 빨간 테이크아웃 잔을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아서 지난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냈나 생각해보았다. 스무 살 이후 크리스마스는 전부 모스크바에서 보냈다. 사실 러시아는 크리스마스가 1월에 있다. 그래서 12월 25일은 밖에 나가도 그리 축제 분위기가 아니다. 25일이 크리스마스라도 눈보라 치고 살을 에는 추위가 계속되는 겨울에 밖이 축제 분위기인게 더 이상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의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고 다른 날은 몰라도 이 날 만큼은 무엇이라도 하면서 행복하게 보내야 할 것만 같았다. 굳이 중심가에 나가서 저녁을 먹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집에서 보드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꼭 나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도 케빈하고 보내야지."
다들 알겠지만 케빈은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TV에서 방영해주는 영화 '나홀로 집에'의 주인공이다. 물론 애인의 부재에 따른 외로움을 우습게 표현한 것이긴 하지만 이 안에는 우리의 학습된 생각이 들어있다. 크리스마스날 만큼은 어찌 됐건 행복하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크리스마스에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에서 보내는 것은 상상만 해도 행복한 일이다. 잔잔한 분위기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부터 시끌벅적한 곳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까지 뭘 하든 기분 좋은 시간일 것이다. 물론 같이 보내는 대상이 꼭 애인일 필요도 없다. 우리에겐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케빈도 우리와 만날 준비가 되어있다.
다만 내가 간과했던 것은 이런 부분이다. 나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그 시간을 기다리며 행복이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것이기에 들뜬 12월을 보냈다. 현재의 일들은 차선이 되었고 온통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연말을 잘 마무리하는 데에 집중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현재의 것들은 내년에 해결할 것들로 제멋대로 규정해버리고 스스로 타협한 것이다. 현재야 어찌 됐건 나에게 행복은 예약되어 있으니까.
미래에 있을 행복. 나는 그것이 현재의 행복을 철저하게 가린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행복이 가려짐과 동시에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둥둥 떠다니기에 기분이 들뜨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단지 이미 세팅되어 있는 현실도피의 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곳에 들어가 있는 것은 마치 태풍의 눈에 있는 것과 같다. 다시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라는 칼바람이 몰아친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말이다.
이것은 꼭 크리스마스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행동은 패턴이기 때문에 만약 크리스마스처럼 미리 세팅되어 있지 않다면 스스로가 미래 어느 시점에다 그와 유사한 것들을 만들어버린다. 그리곤 다시 미래에 있을 행복을 기다리며 현재를 현재로써 살지 않는 것이다. 시험만 끝나면 혹은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해방이 될 것이고 나는 당분간 자유인이 될 수 있으니 행복은 그때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미 그는 자유인이 아니고 그 삶에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은 원래부터 있거나 원래부터 없는 것이다. 오늘은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알라딘처럼 펑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갈구하는 것은 자유를 희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그것을 쟁취할 수 있으나 행복은 쟁취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원하던 것을 이루었을 때 오는 행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취감이다. 무언가를 성취하고 나면 다음 단계의 성취가 보인다. 행복에 단계란 것은 없다.
행복은 한 순간도 유보할 수 없는 현재에 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분들에게는 읽기 불편한 글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달픈 현대인의 삶에 빨간 날이란 마치 축복과 같으니 그것을 기다리며 들떠 있는 것이 더 정상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행복은 현재에서 찾아야 한다. 행복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다. 만약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장소에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라 해도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없다.
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관해 자주 생각에 빠지곤 한다. 처음엔 존재론적으로 행복의 정의와 본질에 대해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행복으로 가는 길은 뭘까라는 인식론적 측면으로 돌아섰다. 그러다 '행복을 미래에서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행복과 가까워지는 가장 빠른 길이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자유주의의 황금기에 활동했던 연설가 로버트 인젠 솔은 이런 말을 했다.
"행복을 즐겨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행복을 즐겨야 할 장소는 바로 여기다."
이 글은 제 자신에 대해 반성하기 위해 썼던 예전 일기를 참고했습니다.
읽고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셨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 조금 남았지만 Merry Christmas!
2015.12.
김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