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 Dec 21. 2015

말할 수 없는 것 <비트겐슈타인>








#1


사람이 여럿 모이면 자주 하게 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연애와 관련된 것이다. 남들의 연애사를 듣는 건 꽤나 재밌는 일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두 개체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이야기는 다이내믹하기 마련이니까.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선 내 이야기도 해야 한다는 게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그렇게 과거에 있었던 혹은 현재 진행 중인 연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연애의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특정 상황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혹은 여자가 남자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던지 서로에게 금기시되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탁구공처럼 오간다.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겨울날 흩날리는 눈송이 개수만큼이나 다양한 방법론들이 나왔다 들어오기를 반복한다. 이야기 참여자 중에는 자기만의 확고한 방법론이 있는 사람도 있고 방법론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나는 사랑과 연애에 관한 이런저런 말들에 회의적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술자리에서 좋은 안주 역할을 한다는 것은 두말할나위가 없지만 웬만하면 말을 아끼는 편이다. 그런 추상적인 것들을 말로써 설명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쁨 혹은 슬픔과 같은 감정이나 선과 악 등도 마찬가지다. 과연 우리는 이런 것의 실체를 인간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일까





#2


이름은 대상과 일치해야 하고, 명제는 사실과 일치해야 하며, 언어는 세계와 일치한다.

<논리-철학 논고, 비트겐슈타인>


현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계를 묘사한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철학적 문제는 세계와 대응하지 않는 언어를 쓰기 때문에 발생한다. 영혼이나 도덕과 같은 말이 그것들의 실체와 완벽히 대응한 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에도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철학자들의 잘못된 언어 사용 방식을 지적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도 오류 투성이인 것이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연애인가? 우리는 그 실체를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다. 규정하려는 노력 자체가 오히려  주제넘은 일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논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인 것이다. 만약 이런 추상적인 것들에 확고한 방법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체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기보다는 우매함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들의 언어 사용 방식을 지적하며 그들의 철학적 논리성을 부정했으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의 가치를 간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의 가치가 말을 함으로써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어쩌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의 메길 수 없는 가치에 흠을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리- 철학 논고,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은 이 글에서 인용한 전기 철학과는 상반되는 논리를 펼치며 자신이 과거에 만들었던 이론을 깨버립니다. 자신에 의해서 깨진 이론이긴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에 대해 환기해보자는 의미에서 글을 써보았습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의 후기 철학이 담겨있는 유작 <철학적 탐구>에 대해서도 다뤄보고 싶은 욕심이 듭니다.








글_김준




2015.12.21

매거진의 이전글 군주의 자세 <군주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