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우뚝 Sep 30. 2023

어느 평범한 우정에 대한 기록

12년 전 이맘때 홍콩에서 아스카를 처음 만났다. 어디서 어떻게 만난 건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정신 차려보니 늘 함께였다. 미숙한 영어 및 중국어로 참 많이도 싸웠더랬다. 그래도 우리는 늘 자매처럼 붙어 다녔다. CUHK에서 교환학생이 끝나자 태국, 라오스로 함께 여행을 갔다. 아스카 지갑이 털리는 바람에 강제로 “개고생 무일푼” 컨셉 여행을 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재밌었던 여행이 없다.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우리는 작별 대신 함께를 택했다. 홍콩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영화를 관람하고 대만 감성에 젖어 함께 대만 가오슝으로 가 중국어 공부를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변명의 여지없는 충동에 의한 결정이었지만 함께라서 다행이었고 마냥 설레기만 했다. 대만에서도 우리는 함께 가오슝 거리를 쏘다니며 한결 나아진 중국어로 자주 다투었고 맘에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쏟아낸 후 빈 공간을 우정으로 채웠다. 대만에서의 학기가 끝나고, 작별할 줄 알았으나 우리는 한국으로 함께 갔다! 캐나다로 가겠다는 아스카를, 내가 숙식 다 해결해 주겠다며 꼬드겼다. 그렇게 부산 본가에서 3개월을 또 동고동락했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작별의 시간이 마침내 다가왔다. 단순한 작별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간 무제한으로 누린, 그리고 다시 오지 않을 자유와의 작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졸업과 취직 등 현실의 무게로 인해 차츰 잊혀갔다. 이후로 알맞은 정도의 어른이 된 우리는 1~3년에 한 번씩 만났다. 2014년 일본, 2016년 홍콩/마카오, 2018년 일본, 2019년 동티모르에서 조우했고 엔데믹을 맞이한 2023년 일본에서 다시 만났다.


4년 만인지만 어제 만난 것만 같이 편했다. 아마도 “사실가족관계(De facto family)“여서가 아닐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스카는 이제 엄마가 되어있었다. 언제나 사랑스러웠던 내 친구는 이제 뭐든지 해내는 슈퍼맨 같은 자랑스러운 엄마였다. 돌을 갓 넘긴 이부키와 함께 우리는 미에(三重県, Mie-ken)도 가고 교토도 갔다. 모험의 유전자가 이부키에게도 흐르는 건가, 이부키는 아주 가끔씩만 칭얼대고 내내 우리와 함께 모험을 흠뻑 즐겼다. 다음번에 만나는 이부키는 훌쩍 커있겠지. 뒤뚱거리며 뛰어와 안기던 이부키는 수줍어하는 어린이가 되어있겠지 생각하니 가끔의 칭얼거림조차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나는 줄곧 “절대적 환대”와 함께였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환대가 조건부라 보았고 이 때문에 절대적 환대의 존재를 부정했다. 절대적 환대란 신원도 묻지 않고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에 기반한 환대다. 말도 모르는 이국에서 내 집과 같이 편안한 공간을 부여받고, 단 한 번의 머뭇거림 없이 지낼 수 있었음이 곧 절대적 환대의 일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이 환대를 고스란히 아스카와 이부키에게 곧 돌려줄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갈라파고스 여행기 (1일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