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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우뚝 Mar 18. 2020

코코넛에 담긴 깨달음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지난 11월, UNDP(유엔개발계획) 동료들과 태양광을 이용한 전기와 식수 공급 사업의 기획을 위해 조사차 아따우로 섬에 다녀왔다. 천혜의 자연, 생물 다양성, 동티모르 내 거의 유일한 관광지로 알려진 이 섬의 방문은 이번이 여섯 번째다. 매번 휴식과 다이빙을 위해 왔는데, 일로서 방문은 처음이다. 우리는 주로 관광객이 방문하는 지역의 반대편에 위치한 두 개의 마을을 방문해,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주변 환경을 살펴볼 요량이었다. 첫 번째 마을에 도착하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열을 지어 춤을 추며 우리를 마중했고, 마을 사람들은 경계와 반가움이 동시에 어린 눈빛으로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오랜만에 방문한 반가운 손님을 너무도 열렬히 환영해준 덕에 시간이 정체되어, 우리는 팀을 나눠 한 팀은 마을 뒷산 수원지를 살피고, 다른 한 팀은 방문하기로 약속한 다른 마을로 배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움직였음에도, 정오가 가까워지자 해는 점차 우리를 향해 다가왔고, 더위에 혀를 내두르며 나는 조금 꼼수를 부려, 뒷산 수원지가 아닌 두 번째 마을로 배를 타고 이동하겠다고 재빨리 말했다.

10분 남짓 이동해 두 번째 마을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배를 정박하고 내렸는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땅을 포옹할 듯 가까워진 태양과 허허벌판, 그리고 태양에 익어버린 키만 한 풀들 사이로 신기루처럼 걸어온 할아버지 한분이었다. 마을 이장이라고 자신을 빠르게 소개한 후,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할아버지의 뒤를 잰걸음으로  쫓으며, 뒷산에 안 가려다 등산을 하게 되었구나 속으로 나를 나무랐다. 숨을 몰아쉬는 우리를 바라보며 이장님은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는데, 시선은 먼 산을 향해 있었다. 인적이 드문 산길을 지나, 까만 흙 위에 내려앉은 낙엽들을 밟고, 걷고 또 걷다 보니 이내 가지고 온 물도 동이 났다. 스무 보만 더 가자, 스무 보만 더 가자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걷고 또 걷다 더 이상은 못 가겠다 싶은 그때, 집들이 한채 두채 보이기 시작하고, 이내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나무 밑동에 쌓인 코코넛 더미였다. 태양열에 따뜻하게 데워진 코코넛을 받아 들고, 그 자리에서 무려 다섯 개를 원샷했다. 물이 귀한 가난한 열대 마을에서는 코코넛이 손님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담은 시원한 보리차와도 같다. 당장이라도 깨끗한 식수와 깜깜한 밤을 밝혀줄 전기를 내어올 것처럼 기대하는 주민들의 눈빛에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전기보다는 물이 더 급한 듯 보였고, 우기에는 빗물을 받아 쓰지만, 건기에는 편도 2시간이 소요되는 산길을 걸어내려 가 바닷물을 떠 와 정화해서 먹거나, 해변 근처 마을에 가서 생수를 비싼 값에 사 온다고 한다. 다른 마을까지 혜택을 확대할 수 있을지, 유지보수는 어떻게 하는지 등 개발에서 중요한 효과성과 지속가능성 등을 빠지지 않고 챙기는 주민들을 보며, 절실함의 공기가 가득한 사무실 밖 현장에 와 있음을, 주민들은 나보다 더 똑똑하고 뛰어난 사람들임을 새삼 느낀다. 언제쯤부터 사업이 시작될지 묻는 주민들 앞에서, 나는 꿀을 먹은 것 마냥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기획한 사업은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실제 사업화되기에 이르기까지 약 만 1년 이상의 시일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에, 마을 사람들의 바람대로 더 효과적이고 더 지속 가능한 사업을 계획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속으로 다짐한다.

물이 변화와 기적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원효대사는 해골바가지에 든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라는 만고의 진리를 깨우쳤고, 샘물을 마시면 젊어진다는 "젊음의 샘" 설화는 대항해시대 탐험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세상으로 나서게 했다. 여전히 세상에 흐르는 물은 때론 "기적의 샘"으로 불리며, 변화를 절실히 원하는 사람들과 이를 믿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선물한다. 내게는 뙤약볕 아래서 들이킨 코코넛 물이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 물 마냥, 서류로 들여다보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현장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뜨겁게 달고도 씁쓸했던 코코넛 맛을 되새기며, 2020년부터 KOICA와 UNDP가 함께 꾸려갈 이 사업을 통해 아따우로 섬 주민들이 깨끗한 식수를 공급받음으로써, 그들의 삶에 변화라는 기적이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해 공급될 깨끗한 지하수는 이들에게 건강을 선물하고, 4시간을 걸어 소금기 가득한 바닷물을 가져오던 시간의 절약은 생산성이라는 기적으로, 이들을 하루빨리 찾아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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