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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자 곁 May 30. 2022

슬럼프가 오면 나는 산책을 합니다

日刊 | 자람의 기본 006


日刊 | 자람의 기본 006

슬럼프가 오면 나는 산책을 합니다


슬럼프가 온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지쳐서 바닥에 누워 숨을 겨우 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골인 기쁨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트랙에 누워 누렇게 뜬 눈앞을 간신히 보는 사람. 또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진 경쟁자를 보며 깊은 박탈감에 시달리거나 언제나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추월하는 걸 겪은 사람. 그중 가장 힘겨운 것은 제 발에 스스로 걸려 넘어져 경기를 망친 사람들이었죠.


비교하고 우위를 정해야만 하는 경기 트랙 위를 온종일 달려야 하는 삶.

무기처럼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하고서 단 한순간을 위해 폭발해야 하는 삶.

1등 또는 기록이라는 욕심과 욕망에 정작 중요한 것을 방치하는 삶.


위의 삶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지만. 단시간 동안 엄청나게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 만큼 실패의 반작용이 큰 편이죠.


저도 달리는 삶이었습니다. 항상 내가 1등인 삶. 자만과 오만이 넘쳐서 절대로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날. 하지만 세상은 넓었고 나의 재능이랑 잔재주에 불과한 것임을, 정말 크게 넘어져 온 몸이 상처투성 되었을 때 그제야 알았습니다. 이렇게 살다 간 내가 나를 망치고 말겠구나 하고.


원하는 성과를 못 내고 매일 야근으로 빈틈없이 몸과 마음이 멍들었을 때, 처음으로 자취집 앞에 있는 큰 공원을 걸었습니다. 6평 남짓한 방이 답답하기도 했었고 어두운 방에 있으면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나는 밖으로 살기 위해 나섰습니다.


사람들을 보는 것도, 그들이 나를 보는 것마저 싫어서 산책시간은 새벽 1시부터 새벽 4시로 정했죠. 처음에는 [산책]이라는 행위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달렸을 때처럼 바닥만 보거나 푹 눌러쓴 모자 아래의 정제된 시선만 쫒았고요. 그러다 점점 새벽의 도시 소리와 호수의 잔잔한 물결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습니다. 이윽고 모자를 벗었고 주위를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엔 크고 하얀 달이 먼 하늘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리고 호수 수면 위로 흔들거리다가 다시 정교해지는 반사된 달도 있음을 알게 되었죠. 항상 존재했지만 나만 몰랐던 하얀빛 풍경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내 삶에도 수많은 풍경이 있었는데 왜 나는 하나에만 목숨을 걸었을까, 하고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그 뒤로 산책 시간은 이른 오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출근 전 한 시간씩 천천히 호수 주변과 동네를 걸었죠. 오전을 맞이하는 저마다의 표정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울음과 자책이 범벅된 엉망진창인 내 몰골이 아닌 삶 앞에서 건실하게 자신을 챙기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매일 만났습니다.


산책으로 마음까지 건강해질 즈음, 나를 혹사시키는 회사에 퇴직서를 냈습니다. 꿈 하나만 바라보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지만, 나는 나의 방향으로 가기 위해. 나만의 풍경을 만나러 가기 위해 당당히 회사를 나섰습니다.


요즘도 저는 슬럼프와 비슷한 것이 왔다 싶으면, 밖으로 나서곤 합니다. 혼자서 오래 산책을 합니다. 삶에 대한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산책하는 것처럼 잠시 설 때도 있고,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합니다. 가끔은 달릴 때도 있고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상쾌해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듯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마주합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몰입이 더 잘 되고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더라고요.



슬럼프는 유일하다 여겼단 자신의 풍경을 잃었을 때 찾아오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의 풍경은 어떠한가요. 풍경 속 단 한 그루의 나무만 있다면, 태풍에 그 나무가 송두리째 뽑혀 없어지게 될 경우. 갑작스러운 상실에 상처받고 있지 않나요? 슬럼프가 왔다면, 내일은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혼자서(꼭) 오래, 산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멋진 풍경을 보고 왔다면, 아마 당신이 머무는 삶의 풍경도 분명 바뀌었을 겁니다.



"우리는 천천히 해도 충분하다. 우리가 저지른 실수들은 대부분 나태함 때문이 아니다. 야심과 욕심 때문이다. 그러니 명상을 하든,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벗어나 나 지신을 위해 시간을 쓰든, 아니면 지금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있는 사람에 집중하면서 속도를 늦춰야 한다."

오토매틱사 CEO 매트 뮬렌웨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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