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좋은 며느리란 무엇일까. 왜 하필 며느리는 ‘며느리’라고 부르는 걸까? 나는 며느리 하면 진심 쥐며느리밖에 안 떠오르는데...
내가 결혼이 하고 싶었던 이유는 우리의 관계가 헤어짐, 불안정 같은 단어와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결혼이 하기 싫었던 이유는 바로 '며느리'같은 단어들이 주는 어려움 때문이었다. ‘사위’, ‘며느리’ 이런 게 다 무엇이며 ‘우리 집’은 우리 집인 거지 왜 ‘친정’이 되어야 하는가. 변화된 가족의 형태를 겪어보기도 전에 호칭만으로 모든 것이 어려워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바람직한 며느리상’과 나의 현실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내가 지레 겁을 먹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송편도 잘 못 빚어서 사촌들 중에서 뒷순위를 다퉜다. 찌고 나서 다 터지거나 반죽이 겁나 두꺼운 송편이 항상 내 거였다. 우리 부모님은 식당을 하시는데 나는 요리나 식당 일을 빠릿빠릿 잘하는 일머리가 없어서 엄마에게 타박을 받곤 했다. 애초에 내 관심사나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그쪽이랑 거리가 멀었다. 동생과 자취를 시작하고부터는 그런 나의 모습을 좀 더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귀찮다며 다 사 먹는 나에 비해, 동생은 깍두기까지 직접 담는 스타일이었으니까.
또한 엄마는 나를 ‘매정한 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면 막상 이야기는 즐겁게 잘 하는데, 세심하지 못해서 좀처럼 먼저 연락하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나의 특성(?)은 시어머니들이 선호하는 며느리상과는 멀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시어머니들은 요리도 척척 하고 살림도 야무지게 잘하고 안부 전화도 자주 드리는 그런 며느리 상을 좋아하실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걸 아는 것과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날 때부터 잘 못했던 것들이 갑자기 잘해질 리가 있나... 흑
나의 요리 실력은 신혼 초창기 때 뽀록났다. 신혼집에 H의 부모님이 처음 오시던 날, 나와 H는 대접할 요리를 하나씩 맡았다. 도통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던 나는 며칠 전 엄마에게 SOS를 쳤고, 엄마는 바로 세팅하고 데우면 되도록 버섯전골 육수와 재료, 알맞은 비율로 섞은 소금, 후추 등의 밑간 봉지까지 택배로 보내주셨다. (엄마 사랑해.) 조미료는 다 넣지 말고 간 보면서 입맛에 맞게 넣어 양을 조절하라는 쪽지와 함께.
그런데 손님맞이 준비로 집 정리에 분주하다 보니 간 맞추는 과정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자신 있게 내놓은 버섯전골은 비주얼만 좋았지 육수에 아무것도 간이 안 된 맹탕이었다. 정신이 없어서 몇 숟갈 먹을 때까지도 모르다가, 긴장이 조금 풀어지고 나니 그제야 버섯전골을 드시는 시부모님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망했구나.
아버지는 나의 수고를 다독이기 위해 “아가, 맛있다. 건강해지는 맛이야.”라고 하셨다. 하지만 건강해지는 맛이 무슨 뜻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흑.. 또한 투명하신 스타일인 어머니는 몇 숟갈 드시다가 조심스레 내게 물으셨다.
“현지야, 나 소금 쬐까 넣어 먹으면 안 될까?”
그 뒤로도 나의 서투름은 끝없이 뽀록났다. 그중 하나는 과일 깎기. 시댁에서 처음 깎은 과일은 하필 물렁복숭아였는데, 그 녀석의 껍질을 예쁘게 깎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복숭아가 자꾸 손에서 으깨지는 거다. 아, 이 놈의 똥손. 내 나름의 고군분투를 다하고 있을 때, 시아버지가 입을 떼셨다.
“아가, 불안해서 안 되겠다. 칼이랑 복숭아 이리 주라.”
이후로 시부모님은 내 손에 과도를 쥐어주시지 않았다. 이건 아마도 엄마가 어느 순간부터 내게 가게 일을 시키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인 듯했다.
나는 일련의 작은 에피소드를 겪으며, 조신하고 참한 며느리는 애초에 나에게 맞지 않는 핏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 평생 그렇게 살지 못할 거면 애초에 지금 패를 다 까자!’는 모토로 살기 시작했고, 그러자 ‘며느리’가 스스로 덜 불편해졌다. 그때부터 나는 요리를 잘하는 척하지 않았고, 살림에 관심이 많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주기적인 안부 전화를 억지로 하지도 않았다. (이 단계에서는 잠시 역할에 개의치않는 듯한 대담함이 요구된다.)
대신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진심을 다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가는 예쁜 카페나 장소들을 좋아하신다. 그리고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신다. 그래서 나는 수원 시댁에 갈 때마다 내 검색 스킬을 십분 발휘하며 시부모님께 나름의 색다른 코스를 제안했다. 두 분을 수원의 핫플레이스로 모시고 가는 거다. 그리고 다리는 길어 보이게, 몸은 날씬해 보이게 사진도 찍어 드리고, 잘 나온 사진은 같이 고른다. 다행히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어머니가 기뻐하셨다.
“너네가 있으니까 내가 수원 살면서도 몰랐던 카페를 다 와보네. 너무 좋아.”
그리고 주어진 통화나 만남에 엄마, 아빠한테 하듯 즐겁고 솔직하게 대화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끔은 좀 많이 솔직한 한이 있더라도 쌓아두지는 않기로.
얼마 전 느지막이 여름휴가를 다녀오신 어머니가 사진을 보여주셨다. 탁 트인 바다, 초록빛 언덕, 그리고 오드리햅번이 입었을 것 같은 예쁜 원피스로 여행룩을 완성하신 어머니의 사진은 참 보기 좋았다. 그런데 그런 사진이 무려 158장이다 보니 70장쯤 보았을 때 탄성과 리액션이 고갈되었다. 여기서 남은 88장을 보며 억지로 리액션을 하는 건 나도 어머니도 기쁘지 않을 일인 것 같았다. 바로 이런 순간에 장난기 어린 표정과 함께 약간의 솔직함을 꺼내보았다.
“어머니, 지금 신개념 시집살이 아니에요? 사진이 진짜 잘 나오긴 했는데, 이 많은 걸 다 보여주시려고 하다니…. 맙소사.”
내 말을 들은 아버지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너스레를 떠셨다.
“아가, 휴가 내내 사진 찍은 나는 어땠겠냐. 휴가를 갔다 왔더니 1킬로가 빠졌더라.”
아가씨도 옆에서 한 마디 거든다.
“언니, 나한테 보여주다가 내가 지겹다고 해서 언니한테로 바통 넘어간 거예요.”
온 가족이 웃으니까 어머니도 웃음이 터진다. “아직 제대로 된 시집살이를 모르는구만! 흔들린 사진은 50장이나 지우고 온거라구!” 하시며 깔깔깔 웃으신다.
이렇게 분위기가 느슨히 풀어지고 시댁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존중해주신 덕분에 결혼 초보다 만남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처음이었다면 말을 못해서 서운했을 일들도, 이젠 마음에 남기 전에 웃고 넘길 수 있어서 한결 속이 편하다.
사실 의식적으로 행동하면 지금보다는 더 주기적으로 안부 전화를 할 수 있고, 자주 뵐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의지가 누군가의 억지로 인한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부디 자연스러운 마음이길 원한다. 이건 우리 아빠 엄마에게도 마찬가지다. 서로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과정에서는 그게 가족이라 할지라도 자연스러운 여유가 필요하다.
비록 지금은 우리 부부가 많이 서투르지만, 엄마가 당신의 시어머니를 진짜 엄마처럼 좋아했고, 아빠가 당신의 장모님을 엄마처럼 애틋하게 생각했듯 훗날 우리 부부에게도 서로의 부모님이 그런 존재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