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과 졸업 그리고 입사와 퇴사
꿈이라서 더 아름다웠을까?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접한 공익광고가 있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KOBACO)에서 만든 광고였는데 '시각장애인은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광고 카피가 열일곱이던 나의 마음을 울렸다. 물론, 장애를 지닌 남동생이 있는 나였기에 메시지의 울림은 분명 더 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장애인을 향해 편견 어린 시선을 던지던 사람들도 광고를 보는 순간만큼은 나처럼 마음이 울릴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왕이면 메시지를 전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10년도 넘은 지금이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수도 없이 많음을 깨달았지만, 열일곱이던 내가 찾은 방법은 광고였고 광고는 내게 그런 매력이 있었다.
때마침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 문/이과를 선택하라고 하셨고 나는 주저 없이 문과를 선택했다. 아버지가 앞으로는 컴퓨터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하니 컴퓨터 학과를 가는 게 어떠냐며 이과를 권하셨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격한 아버지에게 논리적으로 내 의견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고등학교 친구 한 명과 대학교에 가면 꼭 '애드피아'라는 광고 연합 동아리에 지원하자고 약속했다. 그렇게 광고업을 하고 싶어서 - 자세히 말하자면, 광고라는 직업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어서 - 공부를 했고 원하는 학교의 광고홍보학과 07학번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친구와 광고 연합 동아리에 지원했고 둘 다 합격했다.
대학교 시절은 광고를 꿈꾸면서 늘 행복했다. 매주 토요일 동아리에 가서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만났고 함께 회의하고 공부했다. 동아리 선배들이 매주 현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개해주고, 동아리 부원들과 함께 팀을 나누어 경쟁 PT를 준비하며 경쟁하기도 때로는 머리를 맞대기도 했다. 한가지 컨셉을 정해 각자 팀에서 광고 작품을 만들고 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을 초청했다. 밤새워 준비한 전시회에 부모님을 초대하고 사람들의 꽃다발 선물을 받던 그 날이 잊히지 않는다. 다양한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 틈에서 가끔 내가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 사람들의 열정과 꿈이 나를 더 활기차게 했다. 졸업 학기에는 감사하게도 참가한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일도 생겼다. 함께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해외 탐방 공모전에 참가하면서 '장애인 체육 활성화를 위한 방안'에 대해서 제안서를 냈는데 좋은 결과가 있었다. 패럴림픽 발상지인 영국으로 탐방을 다녀왔고, 다양한 부류의 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게 체육이 일상화되어있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하면 한국에서도 장애인들이 체육을 일상화 할 수 있을까에 대한 홍보방안을 고민했고 영국에서 배울 만한 점들을 자세히 적은 제안서를 대한장애인체육회에 제출했다.
광고가 왜 하고 싶어요?
졸업 2개월 전, 운이 좋게 대기업 계열의 광고 대행사 인턴 면접에 합격했다. 그리고 나는 이내 광고가 왜 하고 싶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여기서 왜 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은 면접관들이 흔히 왜 이 직업을 하고 싶은지를 물어보는 말이 아닌, 이렇게 힘든 일을 "굳이! 대체! 왜?" 하려고 하느냐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선배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은 꿈을 향해 왔고 그 꿈을 이루면서 살고 있으면서 왜 자꾸 너만은 이 업계로 오지 말라는 이야기들을 하는지 생각했다. 그때 그들은 대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의 열정을 보고 자신의 삶도 다시금 활기를 찾길 희망했을까 아니면 조금 더 일찍 현실을 자각했기에 던지는 경고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첫 직장과 두 번의 이직
인턴이 끝나고 아쉽게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나는 KT 계열사인 한 회사의 미디어 플래너로 첫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업무는 세상에 차고 넘치는 미디어의 특성들을 이해하고 각 미디어의 광고 효율을 파악해서 광고주의 니즈에 맞는 미디어를 쏙쏙 골라 제안하는 일이었다. 광고주의 예산은 한정되어 있다 보니 '최소한의 예산으로 최대효율을 내고자 하는' KPI를 충족시켜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고 싶은 광고주들을 위해서 집행 예산이 잘 쓰이고 있는지 일 단위, 주 단위, 월 단위로 보고를 하고, 예상 대비 퍼포먼스가 적게 나오는 매체에 대해 추후 운영 방향을 제시해야 했다. 그렇게 3년 가까이 일을 했다. 당시 나름 핫하다는 배달 앱을 담당하고 있어서 신규 매체에 A/B 테스트 진행도 많이 해보고, 나름의 가설에 따라 여러 매체를 바꾸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안일 뿐, 의사결정자가 될 수 없다는 아쉬움에 이직을 결정하였고 외국 항공사 마케팅 업무를 하는 회사로 첫 이직에 성공했다.
두 번째 회사에서는 첫 회사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예산은 제한적이지만 내가 원하는 미디어들을 선택해서 광고 집행을 할 수 있었고, 회사 자체의 SNS 채널에 올리는 콘텐츠 하나하나를 직접 기획하고 발행했다. 디지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행사를 기획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박람회 부스에 참가하여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해보기도 하고, 주요 고객사들을 초대해 브랜드를 소개하는 행사를 기획하기도 했다. 그렇게 2년을 더 일했다. 두 번째 회사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신의 직장'과도 같았다. 9시에 출근하면 6시에는 예외 없이 퇴근했다. 야근 없는 회사, 강요 없는 회식, 서로가 영어 이름으로 부르며 일하는 분위기. 하지만 일과 삶의 균형이 보장되는 삶을 살다 보니 나는 치열하게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언제나 늘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무시무시한 소문만 무성했던 광고대행사로 이직을 선택했다.
소문으로 들었던 그대로 세 번째 회사, 광고대행사의 야근은 말 그대로 헬. 그 자체였다. 새벽 2, 3시 퇴근 그리고 아침 10시 출근하는 일상이었고 가끔 저녁 12시에 퇴근함을 감사하게 여겼다. 제안서 공장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일주일에 제안서를 6~7개씩 써 내려가고, 미팅이 있는 시간 1분 전까지도 일을 정신없이 하기 바빴다. 그런데 일은 정말 재미있었다. 경쟁 PT에서 수주했다는 소식이라도 들리면 그간의 힘듦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하루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밥은 어떻게 먹는지 모르는 시간이 흘러갔다. 광고 대행사는 다닌 경력이 일 년 남짓으로 가장 짧지만 가장 많은 것을 경험했고 그를 통해 성장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많은 경험을 해보니 한 가지 배우고 싶은 것이 생겼다. 매일같이 광고 효율이 왜 이렇게 되는지, 그 이유는 소비자들이 어떠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제안했지만, 나의 인사이트가 늘 제자리에 머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움직이고 싶은데 왜 그런지에 대해서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광고주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한 분석이 아니라 소비자들은 정말 어떠한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광고 및 소비자심리를 배우기 위해 대학원 지원서를 냈고 합격했다. 그렇게 서른 하나의 나이로 대학원 생활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