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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애할 권리 Mar 01. 2017

국립극단 연극 <메디아>

기대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그 자체가 비극이다.

ⓒ 국립극단

눈이 부실만큼 깨끗한 방이 무대 전면에 있다. 얼핏 정신병동 같기도 하다. 가운데 있는 문을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의 사람들이 쭉 앉아있다. 모두 여자다. 옷차림이나 나이 대를 보아하니 가지각색의 시민들을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초조하고 불안한 듯 사람들은 수군대고 안절부절못한다. 대체 왜 그런가 싶은 궁금증이 서서히 생길 때, 안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메디아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분노와 괴로움에 울부짖는 메디아의 목소리는 마치 포효하는 동물 울음소리에 가깝다. 이윽고 문을 열고 메디아가 등장한다. 퀭한 눈빛과 흐트러진 걸음걸이. 검은색 드레스는 힘없이 퍼져있다. 그녀는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 이제 나왔으니 실컷 말해보라며 기회를 주는 듯 스포트라이트가 그녀에게 떨어진다. 메디아는 스탠드 마이크 앞에서 남편 이아손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 국립극단

이렇게 연극 <메디아>는메디아의 분노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물이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정석적인 서사 방식과 달리, 등장부터 이미 터질 듯이 격양되어 있다. 그녀가 이토록 흥분한 이유에는 긴 사연이 있다. 원래 콜키스의 공주였던 메디아는 이올코스의 왕자 이아손을 보고 첫눈에 반해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결심한다. 이아손은 왕위를 계승받지 못하고 삼촌인 펠리아스에게 권력을 뺏긴다. 펠리아스는 이아손에게 콜키스에서 황금 양털을 가져오면 권좌를 주겠다고 제안하고 이아손은 사활을 건다. 메디아는 이아손을 위해 조국의 수호인 황금 양털을 빼내 준다. 부모를 배신하고 형제를 죽이는 것을 감행한 일이었다. 이아손은 메디아로 인해 황금 양털을 얻었지만 펠리아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절망한 이아손을 본 메디아는 펠리아스를 죽인다. 그 사건으로 두 사람은 이올코스에서 추방당해 코린토스에 정착한다. 이아손을 본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은 그를 사위로 삼으려 한다. 즉 메디아에게서 그를 빼앗아 자신의 딸에게 주겠다는 속셈이다. 권력에 목마른 이아손에게 크레온의 제안은 절호의 기회였다. 이아손은 메디아에게 ‘크레온의 요청을 거절하면 가족 모두 코린토스에서 쫓겨날 테니 자신이 궁지에 몰린 가족을 위해 떠나겠다’는 핑계 같은 변명을 하며 크레온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지금 크레온에게 메디아의 사랑은 방해가 되는 짐일 뿐이다. 여기까지의 상황이 메디아의 울부짖음에 담긴 히스토리다.

 

ⓒ 국립극단

다시 연극으로 돌아가 보자. 메디아가 크레온을 죽여버릴 듯한 저주를 퍼부으며 열변을 토하고 있던 순간, 귀가 가려울 법한 크레온이 너무도 태연하게 들어온다. 메디아는 크레온에게 매달리며 붙잡다가, 그의 냉랭한 태도에 침을 뱉고 물어뜯을 듯 달려든다. 파도 타듯 감정이 돌변하는 메디아의 불안한 정서를 볼 수 있다. 이윽고 이 모든 상황을 위해 최후의 결심을 하듯, 크레온의 딸을 독살하고 자신의 아이를 죽여 이아손에게 복수하겠다고 말한다. 이 순간을 관객을 향한 방백처럼 처리한다. 마치 이제부터 자신이 끔찍할 사건을 저지를 것을 관객과 약속하듯, 그러니까 이 비극의 목격자가 되어 잘 봐 두라는 일종의 선포식처럼. 이후 메디아는 붉은 드레스로 갈아입고 등장한다. 복수가 시작된 것이다. 메디아 역은 배우 이혜영이 맡았다. 단단한 목소리와 날렵한 몸, 미묘한 감정의 차이를 명확하게 담아내는 표정… 그녀는 대체 불가한 이혜영만의 메디아를 만들어 낸다. 마치 자석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당겨 버린다. 그래서 그녀 자체로 이 연극은 힘 있게 살아 숨 쉰다. 이 글의 뒤에서는 배우 연기를 제외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지만, 연극이 배우 예술이자 배우를 빼놓을 수 없는 집합체로 봤을 때 이 연극은 이혜영이 있기 때문에 꼭 봐야 할 이유가 생긴다. 

ⓒ 국립극단

연극 <메디아>는 배신당한 한 여자의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단순히 서사에 따른 정의로 하면 그렇다. 하지만, 이 작품은 메디아의 단편적인 감정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연극 속에는 십여 명의 앙상블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계속 메디아의 주변을 돌며 상황을 함께 한다. 앙상블은 메디아를 대신한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비판하고 감싸주기도 한다. 또한 주변 인물을 통해 끊임없이 메디아의 자아를 끌어내 보여준다. 특히 이번 연극에서는 세 가지가 두드러진다. 우선 어머니로서의 모습이다. 메디아는 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하지만, 두 아이들을 볼 때마다 사랑으로 안아준다. 낳고 키운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 통탄하고, 흔들리기도 한다. 또 다른 모습은 여자로서의 섹슈얼한 태도다. 그녀는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성적 욕망을 한껏 이용한다. 유혹과 도발적인 태도로 남자들에게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어낸다. 마지막으로 자존감으로 응집된 자아다. 그녀는 조롱받는 걸 참을 수 없다고 말하고, 손해 보는 상황, 버림받는다는 수동적 입장을 거부한다. 극 중 대사에서도 나오지만, 메디아는 영리한 여자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두려워한다고 까지 묘사된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어내는 게 메디아다. 메디아가 이아손을 사랑해서 그를 위해 모든 걸 했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 모든 일은 메디아 자신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메디아는 이아손을 소유하고자 했고, 결국 소유했으며, 그 소유한 것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는 것이다. 자기애가 강하면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왜곡된 외로움은 집착을 낳는다. 그러니까 메디아의 고통과 피로는 자신이 만든, 자기애로부터 나오는 셈이다. 


*이후부터는 이 연극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 국립극단

이번 국립극단의 연극 <메디아>가 가지는 큰 차이점은 결말에 있다. 헝가리 국립극장 예술감독인 로버트 알포디 연출은 메디아의 결말을 원작 과다르 게 각색했다. 원작에서는 메디아가 두 아들을 죽인 후 수레를 타고 아이게우스에게 떠나는 신화적인 결말이다. 하지만 이번 연극에서 메디아는 이아손의 손에 죽는다. 죄를 지은 자에게 처벌을 내리겠다는 이 결말은, 결국 로버트 알포티 연출의 심판이라 볼 수 있다. 연극에는, (특히 고전을 현대에 올리는 경우에는 더욱) 연출의 시선과 가치 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게 동시대의 관객들에게 더 몰입할 수 있게 해 주고 더 많은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로버트 알포티의 각색도 하나의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만든 결론과 그가 주장하는 말에는 다소 모순이 있다. 

ⓒ 국립극단

로버트 알포티 연출은 이 작품을 ‘아주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남성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 규칙에 저항하는 여성의 이야기라고도 했다. (여성이 서사의 주체가 되는 점에 있어서 페미니즘 작품이라고도 인정했다) 그리고 이아손이 메디아를 죽인 것은 둘의 사랑이 크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그의 말대로 메디아의 ‘사랑’에 타당성을 주고, 그 감정을 응집한 작품이 되려면 오히려 원작처럼 흘러야 하지 않을까? 아이를 죽이고 그녀가 바라던 복수를 이룬 메디아의 모습에서 극이 끝난다면? 우리는 (원작의 이후 이야기와는 관계없이) 관객이 가질 수 있는 상상의 권한으로 그 후일담을 그려볼 것이다. 이를테면 아이를 죽인 죄책감은 메디아의 평생 업이 될 테고, 이아손은 권력에 눈이 멀었던 자신을 반성할 테고, 죄의식에 못 견뎌 자살을 할 수도 있을 테고, 어쩌면 상식을 벗어나 새로운 사랑을 찾아 다시 출발했다고 상상해볼 수도 있을 거다. 사랑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알포티 연출은 이 모든 걸 차단해버린 것이다. 자식을 살해한메디아가 죽어야만, 그것도 ‘이아손의 손에 의해’, 이 드라마가 러브 스토리로서 완성된다는 거라면 메디아의 광기를 제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아손뿐이어야 한다. 즉, 두 사람의 감정적 결속이 깊어야 가능한 논리다. 하지만 정말 그랬나? 심지어 이 연극에서 조차 이아손은 여성 혐오적인 발언을 (꽤나 강렬하게 강조하며) 한다. 이아손에게 정서적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직 왕권에만 관심이 있다. 그가 메디아를 죽이는 순간 스치는 건, 자신의 성공을 망쳐 버린 여자에 대한 복수, 억울한 눈빛 정도다. 아이를 죽인 순간 메디아의 삶은 이미 망가진 상태다. 아이는 메디아의 일부고, 앞서 말한 듯 자기애가 강한 메디아에게 일부가 사라진 순간이기 때문이다. 용서받을 수없는 일에 대한 대가를 그녀 스스로 안고 가게 하는 것이 오히려 로버트 알포 티 연출이 말한 의도에 맞지 않을까? 게다가 그녀는 이방인이다. 외로움을 참지 못하는 그녀가 혼자 남겨졌을 때의 고통은 죽음보다 크게 느껴지지 않을까? 메디아를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죄인인 것도 맞다. 하지만 그녀를 심판하고 처단한 것이 이아손이기에 앞서 쌓아왔던 모든 사랑 논리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이아손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며 권력에 기생하는 껍데기였다. 그리고 그는 메디아를 죽이며 자신의 캐릭터를 깨고 성장한 꼴이 되었다.

ⓒ 국립극단

그간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메디아>가 공연되었다. 소재 자체가 자극적이다 보니 청소년 관람불가 형태인 것도 적지 않았다. 이번 국립극단의 공연에서 관람등급이 높아진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폭력성이다. 아마도 메디아가 어린아이를 죽이는 장면 때문일 듯하다. 그간의 국내 연극에서는 인형을 사용하거나 몸짓 등의 추상적 방식으로 이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어린 아역 배우와 함께 하기에는 어느 정도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로버트 알포티는 그 금기를 깼다. 두 명의 아역 배우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꽤나 사실적으로 재현된다. 메디아가 아이들을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 무대 위에 환풍구처럼 설치된 큰 원통이 비로소 제 역할을 한다. 투명한 원통은 바닥으로 내려오면서 메디아와 두 아들을 가둬버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메디아는 아들을 찔러 죽인다. 붉은 피가 아이의 하얀 잠옷을 물들이고, 메디아의 온몸은 피로 뒤덮인다. 그리고 그 끔찍한 광경이 일어난 현장을 사람들은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맹수를 보듯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자리에서 메디아는 이아손에게 죽어 시체가 된다. (시체라고 표현한 것은 실제로 그녀의 시신을 시체 가방에 넣어 실어 나가기 때문이다) 


로버트 알포티 연출은 충격적인 상황이 사실적으로 일어났을 때 주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맞다, 관객은 강렬한 장면 하나에 모든 감정과 서사를 빼앗긴다. 하지만 그게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톤과 주제의식에 도움을 주는 효과가 아니라면 자극을 위한 자극으로만 느껴진다. 그냥 튀는 것이다. 강조하고 싶은 포인트가 있을 때 그에 맞게 사용해야 효과적이다. 알포티는 그 효과를 위해 ‘자식살해’ 장면을 선택했다. ‘가장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표방한 연극에서 말이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됐을 때 충격이 찾아오고 충격은 오랫동안 각인된다. 아마 이 연극을 본 관객들은 훗날 어떤 연극이냐고 질문받았을 때 그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될 것이다. 

ⓒ 국립극단

나는 이 연극이 오히려 ‘에우리피데스’ 작품의 특징을 살리려는데 중점을 둔 작품으로 보인다. 에우리 피데스는 관객을 놀라게 하는 연극을 쓰고자 했으니까. 대사에도 나온다. ‘신들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른 결과를 생각하고 있어. 우리가 기대한 것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것이 일어나게 되지. 꼭 이곳처럼’…. 바로 국립극단의 연극 <메디아>가 꼭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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