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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애할 권리 Mar 26. 2017

뮤지컬 <판>

살아숨쉬는 무대, 계속 되는 이야기

지난 3월 24일 대학로 CJ 아지트 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판> (정은영 작 / 박윤솔 작곡)은 2016년 CJ 크리에이티브 마인즈 공모 선정작으로 리딩을 걸쳐 본 공연에 오른 작품이다. 20분짜리의 학교 작품에서 시작한 <판>은 90분짜리의 리딩 공연으로 확장되었고, 이번 공연에서 100분의 러닝타임으로 완성도를 더해 관객을 맞는다. 변정주 연출과 김길려 음악감독이 지휘를 맡았고 김지철/유제윤, 김대곤/김지훈, 최유하, 박란주, 윤진영, 임소라, 최영석이 출연한다.

작품은 19세기 말 조선, 당시 비밀스럽게 이야기 판이 펼쳐지는 매설방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는 신분과 성별을 뛰어넘어 세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오간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꾼이 되려는 양반 자제 달수,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전기수 호태, 될성부른 이야기꾼을 알아보는 주막 주인 춘섬과 소설을 필사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는 이덕 등 당대 계급 사회에서 파생된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금기에 저항하는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뮤지컬 <판> ⓒ newsculture

뮤지컬 <판>은 여러모로 둥글게 잘 빚어진 작품이다. 연출은 극이 가진 개성을 장점으로 잘 이끌어낸다. <판>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드라마'가 짙게 파고든 작품이 아니다. 욕망과 갈등, 충돌과 화해의 감정이 크게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각각의 이야기꾼들이 내놓는 이야기를 오밀조밀 엮어낸다. 그래서 사건에 의존하듯 드라마에 기생하면 오히려 서사의 구멍이 보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판>은 다른 전개 방식을 취한다. '고전+이야기+판'이라는 자체적인 키워드를 잘 캐치하여 '판소리'처럼 극을 자유롭게 열고 닫는다. 이를테면, 추임이 들어가면서 서사의 공백을 메우거나 극중극에 인형극을 대입해 우화적으로 펼치는 식이다. 또한 마당놀이처럼 뛰어놀며 자연스럽게 관객 참여를 유도하기도 한다. 이런 요소들이 절로 흥을 돋운다. 풍자에서 빠질 수 없는 정치와 사회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도 지금의 현실에 빗대어 객석의 공감을 끌어 낸다. 배우들의 애드리브와 즉흥적인 추임도 극 안에서 반짝거리며 생명력을 과시한다. 이렇게 극이 숨을 쉬고 활기차게 살아날 순간을 마련해둔 덕에 <판>은 물결타듯 유연하게 흘러간다.


인형과 전통 소품을 활용한 이야기 구현은 소재와 잘 어우러져 극의 몰입과 미술적 완성을 더한다. 사실적인 무대 세트를 사용하는 대신, 긴 막대기와 상자를 활용해 공간을 연출한 점도 인상적이다. 이를 안무와 음악에 적극 활용하면서 동선과 볼륨의 효과도 높인다. 작은 소극장 무대를 하나의 놀이판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밴드와 현악기, 전통 악기로 개성을 담은 음악은 풍성한 사운드를 자랑한다. 넘버는 후킹 송보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상황을 서포트하는 쪽으로 더 기억에 남는데, 결국 이것이 <판>의 넘버가 가진 개성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의상과 조명, 소품의 디테일도 극의 결을 따른다. 그리고 이 모든 물리적인 요소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배우들의 호연까지. 탁 맞아 떨어져 움직이는 시계 태엽처럼, 모두 조화롭다.


<판>은 이야기꾼을 소재로 하는 극의 일반적인 내러티브를 따른다. 중심인물의 감정이 고도화될 여지가 부족하고 개연성에 있어서 걸리는 부분도 없진 않지만, 결과적으로 이야기로 맞받아치는 카타르시스를 향해 끝까지 나아간다. 이는 초기 개발단계를 거치며 대본과 음악이 차곡차곡 다져진 성과일 테다. 그리고 이제, 공연이 무대에서 오래 숨 쉴 요소를 찾기 위한 여정에 들어갔다. 어쩌면 이번 초연은 '풍자'와 '해학'을 카드로 꺼낸 셈이다. 지금의 현실을 담은 장면은 다음 공연에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이 작품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결국 이야기는 현실을 담는 판이다. 현실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흘러야 살아있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판>은 계속 이야기를 담아 낼 수 있는 작품이다. 관객과 함께, 살아 숨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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