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의심과 싸움으로 권력은 숨 쉰다
서울시극단의 20주년 기념작이자 올해 첫 라인업으로 공개된 작품은 헨리크 입센의 <왕위 주장자들>이다. 그간 입센의 대표작들이 종종 공연되었지만, 이 작품은 이번이 국내 최초 무대이기에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입센이 154년 전에 쓴 <왕위 주장자들>은 13세기 노르웨이의 정치적 상황을 담은 역사극이다. 굵직하게는 왕권을 둘러싼 정치적 싸움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상 그 싸움은 피상적일 뿐 실질적으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불안과 갈등에 집중한 심리극으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빼앗으려는 자, 권력에 의심을 만들고 조종하는 자를 중심으로 권력의 본질에 대해 반문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아래와 같다.
*작품의 결말과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으니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면 이후는 스킵하시길 바랍니다.
하늘의 선택을 받아 왕이 된 호콘과 오랫동안 권력의 실세이자 왕권을 노리는 스쿨레 백작이 갈등의 중심에 있다. 호콘은 왕위 주장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지만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고, 스쿨레 백작의 딸과 결혼까지 한다.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스쿨레 백작은 그런 호콘의 태도가 못마땅하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되기 위한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교회의 주교인 니콜라스는 스쿨레에게 호콘이 왕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죽는다. 니콜라스의 말을 확신한 스쿨레는 호콘과 왕위를 두고 정면 대결을 펼친다. 작품의 초반에는 호콘과 스쿨레, 그리고 니콜라스의 권력 다툼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니콜라스의 죽음 이후에는 스쿨레의 내적 갈등에 집중한다. 결국 어떤 사건으로 누가 왕이 되는 가의 문제보다는 한 인간의 감정에 서사가 쏠려있는 셈이다.
이번 서울시극단의 <왕위 주장자들>은 장치적인 수식을 최소화하고, 배우와 텍스트로 공간의 에너지를 채우는 방식을 취했다. 스산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뿌리만 천장에 매달렸을 뿐, 무대는 텅 비웠다. 모든 것을 비워버렸기 때문에, 관객은 배우의 움직임과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주요 캐릭터들의 힘 있는 연기와 군집화된 코러스는 극에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며 무대를 단단하게 지탱한다. 특히 스쿨레의 입체적인 캐릭터를 잘 살려낸 유성주 배우의 호연이 빛난다. 초반부에 보이는 긴장, 중반부에 보이는 반란, 후반부에 보이는 참회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심정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스쿨레는 권력을 가졌지만, 어딘가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에 콤플렉스가 있는 불안한 인물이다. 그는 신에게 왕권을 받고, 아들을 가진, 그리고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감 넘치는 호콘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지속적으로 견제한다. 하지만 스쿨레가 절대악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한 인간이 가지는 악의적인 모습 이면에 담긴 나약함과 속죄의식을 동반하며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동 때문에 괴로워하는 내적 갈등을 겪는 인물이다. 이처럼 후반부 스쿨레에 집중된 감정적 서사 때문에,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도 준다. 전반적으로 빠른 전개와 역동적인 시퀀스가 탄력적으로 이어지는데, 덕분에 2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
<왕위 주장자들>는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열렬히 달려가다가, 결국 그곳이 벼랑 끝임을 깨닫고 떨어지는 스쿨레 그 자체로도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점이 아쉽게 다가온다. 상대적으로 모호한 다른 캐릭터들에게는 감정적으로 다가가기 어려웠고, 그러다보니 매력이 덜했다. 니콜라스 주교가 극화된 개성으로 희극적인 분위기를 띄웠으나, 다소 과잉된 표현에서 중요한 사실의 내용이 휘발되는 감도 있었다. 표면적으로 감정 없이 겉도는 듯한 주변 캐릭터(특히 여성 캐릭터)들도 아쉬운 점이다. 원작의 텍스트를 풍성하게 담은 대사들은 하나하나 생명력 있고 섬세했지만, 쉴 새 없이 (쉬어 갈 여유 없이) 쏟아지다 보니 모두 받아내기 힘들었다. 모두가 고조된, 격양된 비난을 주고받으면서 시작되는 오프닝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으나 관객이 주요 인물의 캐릭터를 파악하고 감정을 따라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 이 작품이 전개가 빠르긴 하지만 사실상 복잡하거나 어려운 서사는 아니다. 그리고 각색과 연출 역시 굵직한 사건을 명확한 포인트로 끊고 짚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 정보 없이 보기에 작품이 어렵고 이해가 안 간다는 평이 다수인 이유는, 아마도 인물의 감정에 닿을 지점이, 그리고 공감하며 스며들 시간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본다.
이전에 보여준 김광보 연출의 작품에 비해 <왕위 주장자들>은 다소 굴곡 없고 평면적이란 느낌을 받았는데, 극적으로 고조되어 달려가기 위한 방식의 선택이 전과 달랐기 때문이었을까? 날카로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연출적 해석을 배제한 느낌도 있다. 전쟁 장면이나 코러스 등 다수 배역의 움직임이 표면적으로 잘 드러날 수 있는 장면이 중간중간 힘 있게 그려지는데 반해, 인물의 심리전에 집중한 이 작품에서 정작 그들이 진득하게 감정을 내비칠 수 있는 모먼트는 미약했다. 결국 누구에게 어떤 감정을 열어주느냐가 연출적 시선일 테다. 시니컬하면서도 다소 풍자적이 마지막의 맺음에 오히려 힘 빠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왕위 주장자들> 극 자체가 사건이 인물을 흔들지 않는 서사이기에 그 부재가 아쉽다.
치열한 싸움은 호콘의 승리로 일단락되지만, 과연 누가 권력의 승자인가에 대해서는 질문을 남긴다. 어쩌면 또 하나의 싸움이 시작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권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다주지만, 정작 권력은 보이지 않는 힘이다. 권력을 있게 하는 것은 결국 그 힘을 향한 믿음과 신뢰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의심과 불신이 그림자처럼 따른다. 영원한 권력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권력의 근원은 무엇인가? 권력 싸움을 하는 자가 분란을 조장하는 자인가? 지금 우리 시대에도 던질 법한, 그리고 그 답을 듣고 싶은 물음이 <왕위 주장자들>을 관통하고 있다. 헨리크 입센은 이 작품을 1863년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