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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애할 권리 Jun 04. 2017

연극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

국립극단 '한민족디아스포라전' 시리즈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

우선, 제목 그대로다. 이 작품은 로맨스가 아니다. 그럼 무슨 이야기냐고? 고아가 된 남매가 어릴 때 헤어지고, 25년 만에 재회한다. 누나인 미소는 영국으로 입양되었고, 동생인 한솜만 홀로 한국에 남아 서로 완전히 단절된 인생을 살아온 상황이다. 어렵게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거쳐 사랑을 확인하고 결국 근친상간에 이른다. 이렇게 연극의 줄거리를 설명하다 보면, 가만있자... 이거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막장 드라마인데... 하는 생각을 스스로 먼저 하게 될 것이다. 남매간의 사랑? 이미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사용된 모티브라 생각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은 로맨스가 아니다. 그러니까 섹슈얼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기존에 흔히 봤던 근친상간 드라마의 문법대로라면, 두 사람이 어쩌다 서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어릴 때 헤어진 남매였다는 식의 서사가 되어야 할 테다. (그래야 두 사람이 사랑한 감정이 드라마 안에 쌓여 설득력이 생기고, 운명 앞에 더 애틋해진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서로 남매인 것을 확인하고 인지하는 순간부터 감정이 시작된다. 다시 말해 미소와 한솜은 남매였기에 서로 끌린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로맨스가 아니다. 치유될 수 없는 상처와 외로움에 고통스러워하던 존재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또 다른 존재를 만나 반응하는 이야기다. 어린 미소는 부모님을 잃고 동생인 한솜을 데리고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를 버려둔 채 사라진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사고와 짐을 안게 된 미소는 현실에서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입양아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미소는 어디를 가든 편안할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현실에서 찾아든 괴리감과 동생을 버리고 떠났다는 과거의 죄책감은 떨칠 수 없는 족쇄처럼 그녀를 따라다녔다. 반면 한솜은 언젠가 미소가 자신을 데리러 올 거라 믿고 보육원에서 기다린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전환되는 세월만큼 원망은 쌓이고, 결국 성인이 될 때까지 불안한 심정으로 어둡고 힘든 인생을 살아간다. 세상에 둘만 남겨진 유일한 혈육이었던 미소와 한섬은 그렇게 분리된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듯한, 아니 그보다 더 회복될 수 없는 심적 공허함은 이들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계속 변해갔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반쪽짜리 미숙한 상태로 머물러 있던 것이다.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줄 존재를 갈망하는 동안 삶은 망가져갔고, 생존마저 위태로워진다. 두 사람은 그렇게 극도의 불안한 상태로 재회한다. 때문에 처음부터 화해 모드의 상봉이 불가능했다. 미소는 한섬을 보는 순간 과거가 떠올라 괴로워했고, 한섬은 그런 미소를 싸늘하게 보며 증오에 가까운 원망을 토로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 깊숙한 곳에는 기나긴 여정을 끝내고 정착할 수 있다는 희망과 안도가 있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확인하듯, 둘은 끊임없이 사랑하냐고 묻고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세상을 향한 불신과 세상이 주는 소외감은 두 사람을 더욱 극한으로 몰고 갔다. 미소와 한섬은 결핍을 채우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끌어안는다. 침대 위에 엉켜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물리적으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이자, 치유의 의식처럼도 보인다. 어쩌면 살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 한섬은 미소에게 엄마처럼 바다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 순간 미소는 한섬을 뿌리친다. 서로가 같은 자궁에서 탄생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이 원초적인 의식이 결국 자신을 세상과 더 단절시킬 것임을, 금기를 깨는 순간 또다시 죄의식에 빠질 수 있음을,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존재를 잃어버릴 수 있음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미소는 그러한 현실에서 도망치듯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다.


이쯤이면 남매의 비극적인 운명에 관한 이야기라 정의하기 좋지만, 사실 이 작품에는 '디아스포라'라는 정체성과 문제의식이 관통하고 있다. <이건 로맨스가 아니야>를 쓴 작가 인숙 차펠은 한국에서 태어나 2살 때 영국으로 입양된 한인 작가다. 그녀는 이 작품을 10여 년 전에 집필했다. 작가와 작품을 일직선에 두고 볼 수는 없지만, (그리고 그녀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이 작품은 명백한 픽션이지만) 작품 속에는 현실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담겨있기에 단순히 연극적 드라마로 치부하기 어렵다. 작품의 배경은 한국이고, 미소는 절박한 상황을 한국에서 겪으며 한국인이 될 수 없는 외국인으로서 한계에 부딪힌다.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차갑다. 사무적인 통역관과 홀트 직원, 속물적인 바니걸과 자본을 권력 삼아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외국인 재력가는 끊임없이 미소를 압박한다. 그들은 하나 같이 미소를 보며 '너 같은 사람들 잘 알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미소를 모른다. 미소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떤 상황인지 결코 모른다. 그들은 편파적인 잣대로 미소를 판단한다. 이러한 설정은 미소가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작가가 디아스포라로서 한국에서 받은 인상을 묘사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작가 스스로가 느꼈던 한국에 대한 원망, 분노, 애탄의 감정이 미소를 둘러싼 인물들의 극단적인 태도를 통해 분출되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어떤 감정인지 모르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작품은 말한다. 미소와 한섬의 사랑은 로맨스가 아니라고. 이들의 사랑은 어쩌면 당사자가 될 수 없는 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일지 모른다.


이번 작품의 연출적 방향 역시 작가가 설정한 세계를 이해하고, 관객들이 그 세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한국어로 풀어낸 설정은 미소와 한섬의 감정에 다가가는 데 다소 방해가 되었다. (대본에서) 한섬은 미소에게 능숙하지 못한 영어로 말한다. 이는 한섬의 원망 어린 거친 말속에 그리움이 묻어있고, 미소를 정서적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장면이 연극에서 전부 한국어로 대체되다 보니 둘의 대화가 평면적으로 느껴졌다. 둘의 관계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관람 중에 원래의 설정을 계속 여과해내는 노력을 쏟아야 했다. 이번 국립극단 '한민족디아스포라전'에서 이러한 언어적 한계는 분명 극복해야 할 과제로 보인다. 영어를 기반으로 한 대본에서 한국어와 한국적 설정이 삽입된 다는 것은 언어 그 이상으로 상징적인 역할을 위해 의도한 방식일 수 있다.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그 의도가 모호해지거나 희석된다면 관람자로서는 작가가 설정해 놓은 세계 안에서 혼란이 생긴다.


당연히 연극 한편으로 디아스포라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연극 역시 어쩌면 특정 작가에 한정한 단편적인 시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렵고 불가능하다고 소극적으로 움츠린다면 이해관계는 더욱 단절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무엇이 불편한지 묻고,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는 시도가 결국 소통의 시작일 테다. 더불어 이번 시리즈가 연극적 드라마뿐만 아니라, 극적 형식이나 가치관에 있어서도 다양성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경험의 폭을 넓혀줄 것이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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