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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애할 권리 Jul 28. 2017

연극 <비너스 인 퍼>

권력을 향한 발칙한 도발

연극 <비너스 인 퍼>는 1870년대 오스트리아 작가 자허마조흐가 쓴 동명의 소설을 모티브로 미국의 극작가 데이비드 아이브스가 남녀 2인극의 형태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원작 소설인 <비너스 인 퍼>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서 성적 쾌락을 느끼는, 한 마디로 '마조히즘'이라는 도착 증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죠. 실제로 마조히즘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뿌리도 여기에 있고요. 연극은 자허마조흐가 쓴 소설을 무대에 올리려는 연출가 토마스와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 벤다가 만나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극 중 극의 형태로 다룹니다.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아요.



연출가 토마스는 작품에 출연할 여자 주인공 벤다 역을 뽑는 오디션을 엽니다. 하지만 오디션이 끝나도록 적합한 배우를 찾지 못합니다. 토마스는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배우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죠. 그 순간, 뒤늦게 한 배우가 극장에 도착합니다. 그녀는 사정이 있어서 늦었다며, 꼭 오디션을 봐야 한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믿거나 말거나, 자신의 이름이 벤다라고 소개한 이 배우는 의상까지 갖춰 입고 심지어 제공하지도 않은 풀 대본을 당당하게 꺼냅니다. 오디션 명단에도 없는 배우가 막무가내로 찾아와서 들이대자 토마스는 당황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돌적인 벤다의 행동에 점점 호기심을 느끼죠. 어쨌거나 한번 들어는 볼까 하는 심정으로 토마스는 오디션을 시작합니다. 자신이 직접 상대역을 맡아 대본을 읽으면서 말이죠. 그렇게 시작한 두 사람의 오디션. 작품에 푹 빠져 있는 토마스와 달리, 벤다는 토마스가 그린 벤다의 모습이 여성 혐오적이고 성차별적이라며 대본을 읽다가 불쑥불쑥 토마스를 비판합니다. 벤다는 이 작품이 S&M 포르노라고 말하고, 토마스는 열정적인 사랑이야기라고 반박하는 식이죠. 오디션이 진행될수록 현실과 연극의 경계는 희미해집니다. 결국 작품을 통제하던 토마스도 점차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인물에 몰입하게 되는 거죠. 상황이 극화될수록 주도권은 점점 벤다에게 주어지고, 두 사람의 권력관계는 처음과 완전히 다르게 역전됩니다.

비너스 인 퍼 (c) 달 컴퍼니

이 작품은 2010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첫 선을 보이고, 2011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호평을 받았습니다. 2012년 토니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상 노미네이트를 비롯해, 최우수 여우 주연상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2014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만든 영화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 역시 희곡을 충실하게 따르며 연극적인 감각을 취합니다. 제한된 장소에서 배우의 호흡을 농밀하게 담으며, 극과 현실을 오가는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거든요. 당시 폴란스키 감독의 부인인 에마뉘엘 세니에르가 벤다 역에 출연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가 상당히 인상적이에요. 올해 국내에서 만나는 초연 무대는 '달 컴퍼니'가 제작을 맡고, 토마스 역에 이도엽/지현준 배우, 벤다 역에 방진의/이경미 배우가 연기합니다. 캐릭터의 색이 굉장히 강한 극인데, 출연진의 개성이 다양해 페어에 따라 다른 결을 보여주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공연은 지현준/이경미 페어로 관람했습니다)



연극 <비너스 인 퍼>는 권력의 구도가 역전되는 이야기 구조입니다. 이는 2인극에서 자주 그리는 인물 방식이죠. 말하자면 강자가 약자로, 약자가 강자로 상황이 뒤바뀌며 마지막에 카타르시스를 주는 형태입니다. 토마스와 벤다의 인물 설정에서 상반된 대립을 찾아볼 수 있어요. 우선 배우를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그리고 작품을 통제할 수 있는 연출(각본) 가와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작품 속 인물을 받아들여 연기해야 하는 배우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하나는 주체적이고 다른 하나는 수동적이죠. 토마스가 창작자의 권력으로 여자 주인공을 형편없는 인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벤다의 말에서 처럼요. 연극으로 들어가면, 이 부분이 자연스럽게 성적인 역할의 지배로 이어집니다. 애초에 '마조히즘'이란 노골적인 소재가 성적인 권력에서의 상하관계를 전제로 하기도 하고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연극'이라는 테두리를 두고, 두 사람이 상반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토마스는 극 중으로 들어가면서, 권력에 지배당하는 인물 구쳄스키로 분합니다. 반대로 현실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벤다가 극 속에서 쾌락의 주도권을 쥔 권력자가 되지요. 두 배우가 한 끗 차이의 경계를 오가며 연기하는 모습이 통쾌한 재미를 주는 이유입니다.


(데이비드 아이브스의 희곡에서 어떻게 명시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와 국내 버전 연극은 시작 시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는 벤다가 오디션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가는 시점부터 시작해요. 극장에 들어서고, 그곳에서 퇴근을 준비하고 있던 토마스를 만나는 숏입니다. 즉, 벤다의 시점이죠. 연극은 토마스의 시점에서 출발합니다. 토마스가 극장 안에 있는데, 벤다가 침입하듯 찾아오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는 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판타지'적 요소를 살피는데 도움이 됩니다. 벤다는 토마스의 뮤즈입니다. 토마스에게 영감을 준 뮤즈이고, 토마스가 창조한 뮤즈이고, 토마스를 지배하는 뮤즈죠. 어쩌면 배우 벤다는 토마스가 불러들인 상상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듭니다. 왜냐하면 벤다가 찾아오기 전, 연극은 극장의 전력이나 전화 수신도 엉망일 정도로 비가 내리는 날임을 끊임없이 암시하거든요. (주인공은 꼭 그런 날 귀신을 보죠) 그리고 벤다의 행동은 우연이라 넘기기에는 너무도 수상한 구석이 많습니다. 끊임없이 초현실적인 상황을 조장하는 인물이지만, 작가는 여기에 개연성을 부여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아요. 벤다가 연극에 불만을 내비치며 자주 '모순'적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때마다 토마스는 '모호'한 것이라고 교정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자신이 창조해낸 세상 그 자체에 취해버린 토마스의 상태를 보여주는 메타포로도 보입니다. 그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아프로디테와 같은 뮤즈가 친히 방문한 걸지도 모르죠.

비너스 인 퍼 (c) 달 컴퍼니

캐릭터를 잠깐 살펴볼까요. 토마스는 겉으로는 통제자 인척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모순 덩어리 인물입니다. 가장 큰 약점은 자신이 마조히스트라는 것이죠. 이는 토마스가 극 중 인물을 연기하면서 슬며시 쾌감으로 드러납니다.  특히, 이번 연극에서는 토마스가 어린 시절 처음으로 마조히즘에 눈을 뜬 인물을 연기하는 장면에서 더 드라마틱한 힘을 불어넣습니다. 음악과 조명으로 완전히 독무대를 만들어 주죠. 그때만큼 토마스는 명배우처럼 연기합니다. 마치 비너스 상이된 듯한 섬세한 몸짓까지 선보이죠. (저거 분명 경험담일 거야, 하는 추측을 하도록 친절하게 분위기를 조성해줘요. 작가가 쓴 작품이 전부 작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중요한 논리이지만, 가끔은 작가의 실체가 작품에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죠. 의도했든 아니든, 여하튼 여기서 토마스도 그런 셈이고요) 또한 토마스는 여자 배우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만, 여자 친구 앞에서는 약자의 태도를 취합니다. 사랑에 있어서 정복당하는 관계를 추구하기 때문이겠죠. 반면 배우 벤다는 직설적이고 직관적입니다. 속 마음을 거침없이 표현하면서도 상당히 영리하게 토마스를 조련합니다. 그녀는 토마스의 감정을 슬슬 끄집어내면서, 자신이 불쾌해지는 순간이 오면 맥을 딱 끊어버립니다. 왜곡된 토마스의 찌릿한 감정선을 단번에 뽑아버리는 건 언제나 현실의 벤다입니다.


한편, 이 작품은 '의도된 폭력'과 '의도하지 않은 폭력'을 대비하며 폭력의 정의를 묻습니다. 의도된 폭력은 마조히즘이죠. 토마스는 쾌락을 위해 의도적으로 가학을 묘사하면서 그것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그저 예술이라고 주장하며 폭력을 용인합니다. 하지만 벤다는 그런 장면을 비난하고, 모욕을 느끼죠. 사실 매를 맞는 건 토마스이고 구쳄스키예요. 벤다는 그를 때리고 희롱하는위치입니다. 하지만 벤다는 그런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작가가 욕망을 채우기 위해 권력 행사를 했다고 지적한 것이죠. 그러니까 왜곡된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작가의 폭력성을 들며 윤리관, 직업의식을 반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매를 맞는 사람만 폭력을 당한 것이 아니니까요.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순진함으로 가장한 행동이 더 큰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벤다는 역할 놀이의 교차와 반복을 통해 이 같은 지점을 토마스에게 시사합니다.

마지막에 이르면 토마스는 벤다가 됩니다. 벤다는 황홀에 젖어 있던 토마스를 환상에서 깨워 폭력적인 현실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토마스가 그토록 바라던 여신의 모습으로 그 앞에 서죠. 하지만 자신이 만든 뮤즈 속에 갇혀버린 토마스는 그 여신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바라만 봅니다. 꽤나 신화적인 설정을 한 결말이죠. 이거야 말로 고도의 복수극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칩니다.



이번 초연에서 무대는 런웨이 형태를 택했습니다. 블랙박스 극장의 자유로움을 활용한 측면이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힘의 대비를 상징하려는 의도로도 보입니다. 길게 뻗은 무대의 한 쪽은 책상을 두고, 다른 한쪽은 소파를 두어 현실과 극화된 허구를 오브제의 경계로 표상합니다. 한마디로 토마스와 벤다의 세계죠. 앞서 말했듯 이 연극은, 극 중 극을 넘나들며 권력의 주도권이 오고 갑니다. 배우들은 손바닥 뒤집듯 에너지를 발산하고 수렴합니다. 특히 토마스 역은 그 기폭이 큰 데, 집중력이 좋은 지현준 배우가 노련하게 잘 연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횡적으로 된 동선은 어쩔 수 없이 관객의 시선을 자주 분산시킵니다. 게다가 무대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게 위치한 객석이라, 특정 장면에 있어서는 시야 방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죠. 특히 소파에서의 씬에서는 소파의 등받이 때문에 반대쪽에 앉을 경우 배우와 완전히 차단됩니다. 시야가 왜곡되거나 방해되면, 배우가 전달하는 에너지는 자연스레 반감되는 법이죠. 영화에서 토마스 역을 맡은 마티외 아말리크의 연기를 잠시 소환해보면, 닿지 못한 부분이 아쉽게 느껴집니다. (물론 영상 매체가 주는 차이가 있고, 그걸 몰라서 드는 예는 아닙니다) 마티외 아말리크는 대본을 읽던 토마스가 성적으로 흥분되는 감정을 애써 아닌 척 감추다가,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터져 나오는 모습을 굉장히 잘 그려냅니다. 구두나 가죽옷, 이런 도구들만 봐도 상상이 되는지 어루만지는 순간 눈빛이 달라집니다. 모순적인 인물상이 살아나죠. 연극에서 그런 장면들이 나올 때, 시선을 등지고 있다 보니 배우의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기 어렵더군요. 그래서 다음 장면에서 내뱉는 대사들이 갑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 화를 내고, 당하면서도 계속 저 오디션을 하고 있는 건가? 토마스의 내적 서브텍스트가 안 읽히는 상황에서는 단편적으로 그런 의문이 들죠. 이경미 배우는 벤다가 가진 여러 가지 속성 중 당돌한 모습을 시원하고 매력적이게 표현합니다. 벤다라는 인물은 다양한 성향을 구축하고 있는 캐릭터라, 방진의 배우가 도출하는 특성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태어날 것 같다는 생각도 되네요.


연극 <비너스 인 퍼>는 '마조히즘'이라는 소재를 통해 권력의 남용과 오용을 말하는 작품입니다. 자극적인 소재를 연극에서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코믹하게 살려 맺어낸 희곡이죠. 뚝심있고, 개성이 강해요. 이번 초연 무대에서는 발칙한 도발을 무장한 설렘과 즐거움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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