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도 높은 감정의 무대
무리에 있어도 유독 눈에 띄는 배우가 있다. 큰 키에 말간 얼굴을 가진 이승주가 바로 그렇다. 또렷한 이목구비는 과함 없이 부드럽게 반듯한 선을 이루고, 시원하게 뻗은 눈매는 말로 하지 않는 이야기까지 담아낸다. 그래서인지 조명이 그를 비껴간 순간에도 무슨 사연이 있을까 궁금한 마음이 들어 자꾸만 시선이 멈춘다.
이승주는 2008년 KBS 공채 탤런트로 선정돼 방송 활동을 하다가, 2010년 연극 <내 심장을 쏴라>로 주목받으며 본격적인 무대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소개에는 언제나 ‘KBS 공채 탤런트 출신’이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무대를 발판으로 스크린에 진출하는 것과 달리, 귀향하듯 역방향을 선택한 그의 행보는 다소 이례적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연극을 향한 애정을 끊임없이 고백하고, 연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을 숨기지 않는다. 어느 인터뷰에서는 “연극에서 만난 인물을 긴 시간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작업이 나의 느린 호흡에 더 잘 맞는다”며 연극을 하는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그의 느림은 쉽게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이고, 신중함은 완전에 가까워지며 진중한 인물을 만들어 냈다.
처음 그를 본 건 국립극단의 연극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2013)에서다. 스스로 새로운 나라를 세워 왕이 되려는 젊은 도련님 역이었다. 의욕과 욕망은 앞서지만 정작 자신의 군대도 제대로 이끌지 못하고, 무당에게 의존해 거사를 치르고, 권력을 위해 자신의 어미까지 죽이는 나약하고 비겁한 인물이었다. 이승주의 반듯한 인상은 불완전한 인물과 만나며 드라마틱해졌다. 다시 말해, 인물의 불안한 심리가 흐트러지지 않을 듯한 배우의 이미지를 깨고 발화한 것이다. 도련님은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책임지지 못하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었다. 그런 위태롭고 미성숙한 존재를 이승주는 때묻지 않은 언어와 겁에 질린 눈빛, 위축된 행동으로 인상 깊게 만들어냈다.
이후 연극 <M. 나비>(2014)의 르네 역을 통해 이승주가 가진 드라마틱한 매력은 한층 명확해졌다. 마치 본연의 아이콘처럼 ‘이승주만의 불완전한 캐릭터’를 완전하게 빚어냈다. 송 릴링에게 마음을 사로잡힌 르네는 반듯했던 일상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자의적으로 환상에 갇히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다. 여기까지는 전작에서 보여준 도련님의 캐릭터와 연장선에 있는 듯한 유사성도 있는데, 후반에 들면 그를 붙잡고 있던 잠재 의식을 깨고 원초적으로 반응하며 감정이 농밀해진다. 르네가 송 릴링의 실체를 알게 된 후, 모든 걸 받아들이면서 초연 해지는 순간. 이승주는 투명해진다.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가 르네 그 자체인 것처럼.
<유리 동물원>(2014)의 톰을 맡으며 이승주는 한층 단단해졌다. 일탈을 갈망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자, 저돌적이고 동물적인 본능을 가진 톰의 모습은 이승주라는 배우를 통해 뚜렷하게 이미지화되었다. 1930년대 혼란스러운 시대가 만들어낸 반항아는 복고적인 투박함을 내재하면서, 동시에 현실의 벽에 부딪혀 방황하는 동시대 자화상으로도 보였다. 특히 톰의 어머니 아만다 역의 김성녀 배우와 만나며 톰은 더 빛을 발했다. 어디로 튈지 몰라 조마조마한 톰의 감정을 아만다가 수렴하고 다독이며 탁월한 조합을 이뤄냈다. 이승주는 기댈 수 있는 안정적인 존재를 만나서인지 한층 여유로운 연기를 보여줬고, 그 여유는 이상주의자 톰의 자유분방한 성격과도 잘 어우러졌다.
같은 해 공연된 <사회의 기둥들>에서는 도덕적이고 고결한 척하는 뢰를룬 역을 맡아 이미지 변화의 방점을 찍었다. 도덕 교사인 뢰를룬은 보수적이고 위선적인 인물이다. 한마디로 말과 행동이 다른, 표리 부동하고 치졸한 캐릭터다. 유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래서 사회 부적응자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극 속에서 이러한 모습이 우습고 골 때리게 묘사된다. 이승주는 뢰를룬을 꽤나 희화화했다. 잔머리 한 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경직된 움직임과 만화적이고 격양된 말투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이질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코믹함이 다소 회화적이고 고딕적인 이 연극에 발랄한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후 2015년에는 <나는 형제다>와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와 같은 현대극에 출연하였고, 2016년에는 <세일즈맨의 죽음>과 <글로리아>, <두 개의 방>을 통해 장르적 스펙트럼을 넓혔다. 이승주가 연기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앞서 말했듯 불완전한 존재로서 현실에 억압되어 있거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파국에 이르는 비극상에 기울어져있다. 가장 최근에는 영화 <악녀>에 출연해 배신자의 길을 걷는 인물을 연기했다. 이승주는 확실히 인간이 가진 이중성, 추악함과 결함을 인정하지 않고 숨기려는 나약함을 명민하게 캐치해 표현할 줄 아는 배우다.
외향적으로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는 자신이 생각만 많고 과묵하며, 진지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와 일전에 인터뷰로 만난 적이 있는데 어느 정도는 실로 그러했다. 대신 재미없다는 그의 주장은 신중한 사람이라고 정정해본다. 그는 질문에 답할 때면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내비칠 수 있는 단어를 곱씹어 찾았고, 적당한 대답을 찾기 어려울 경우에는 에둘러 대충 말하기보다는 ‘모르고 아니고 어렵다’고 솔직하게 반응했다. 그러한 천성이 연기에도 그대로 묻어난 것임을, 그래서 이승주의 연기를 보고 순도 높은 감정을 느꼈던 것임을 그와 이야기 하는 동안 깨달았다.
이승주는 오는 10월에 개막하는 연극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에 출연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으로, 1950년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립된 인물들의 이야기다. 그가 이번에는 어떤 인물을 보여줄지, 그리고 얼마만큼 더 성장해 있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