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릴 미>의 해설판
연극 <네버 더 시너 Never the Sinner>는 미국의 유명 희곡 작가 존 로건 John Logan이 1985년 발표한 작품으로 1924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시카고 영아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같은 사건을 다룬 뮤지컬 <쓰릴 미 Thrill Me>(2005)가 우리나라에서는 앞서 공연됐지만, 사실 존 로건의 연극 대본이 먼저인 셈이다. 뮤지컬 <쓰릴 미>를 재미있게 관람한 관객이라면 <네버 더 시너>는 마치 번외편, 혹은 해설판처럼 조금 더 심도 깊게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극을 뮤지컬로 혹은 뮤지컬을 연극으로 전환하는 방식에 대해, 그러니까 장르적 특징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비교해볼 수도 있다.
<쓰릴 미>는 2인극이다. 주인공은 10대 용의자 리차드와 네이슨. 용의자들 뿐이다. 극은 형을 받는 장면부터 시작해 두 사람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플래시백 구성을 취한다. 어떻게 살인을 저지르고 대처했는지에 대한 사실적 행위보다 사건을 겪으며 생기는 두 사람의 갈등, 심리적 관계에 더 초점을 둔다. 이건 뮤지컬이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음악을 전반으로 내세운 성스루 형태인 <쓰릴 미>는 두 인물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심적 변화를 겪는 지를 노래로 말한다. 주변 인물과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 상황은 지워냈다. 텍스트가 말하지 않는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모먼트가 상당히 많다. 따라서 관객은 두 인물이 행한 죄를 논하기보다는(죄는 명백히 유죄임을 앞에 전제해 두고), 두 인물이 가졌을 신뢰와 배반, 사랑과 증오의 감정에 더 몰입하게 된다.
<네버 더 시너>는 10대 용의자인 네이슨 레오폴드와 리차드 롭을 비롯해 이들을 구속한 크로우 검사와 이들을 변호하는 대로우 변호사, 그리고 경찰과 기자, 재판관 등의 제3자들을 링 위로 끌어들였다.(국내 연극에 등장하는 배우는 7명이다) 자, 인물이 많아졌으니 분명 이들에게도 역할이 필요할 것. <네버 더 시너>는 명백한 죄를 심판대 위에 두고 정의를 논한다. 극은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이들을 똑같이 죽음으로 응징하는 것(사형)이 정의로운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달려간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이 두 사람을 대상화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왜' 보다는 '어떻게'가 더 잘 드러나는 것도 특이한 부분)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전사를 전반부에 걸쳐 공들여 설명하고, 후반부는 이들을 바라보는 언론과 여론의 시각을 직관적인 텍스트로 펼쳐낸다. 아마도 작가는 관객이 주인공에게 감정적으로 다가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수평적 구성을 해둔 듯하다. 두 사람의 드라마는 서스펜스를 가지고 이어지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사이에 극 중 극 형태로 넣었기 때문에 극적인 순간 다시 재판 장인 현실로 복귀된다. 사형에 대한 양가적인 주장을 균형 있게 담으려는 의도도 보인다. 이를테면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도 아주 소름 돋을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심지어 이를 관객이 보게 해놓고) 대로우 변호사의 최후변론을 아주 설득력 있는 논리와 확고한 자세로 내세워 정점을 찍게 한다.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시한 <쓰릴 미>가 시적이고 감정적 반향을 일으키는 작품이라면, 사건 그 자체에 중점을 둔 <네버 더 시너>는 현실적이고 이념에 대한 가치 판단을 던지는 작품인 셈이다. 당연히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아니.. 그랬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대는 재판장과 살인사건 현장을 오가는 배경치고 꽤 화려한 편이다. 중앙에 마련된 피고인의 자리 역시 (그리고 그들을 비추는 조명 역시) 화려하다. 레오폴드와 롭의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대로우와 크로우, 그리고 기자들이 이들의 증언을 지켜보듯 무대 위에서 주시한다. (주시하는 모습에 감정이 느껴지는 걸 보니 단순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닌, 계속 극 속에서 조사하고 관찰하고 있는 셈이다) 롭 역할을 맡은 박은석 배우는 그가 잘 하는 연기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레오폴드 역의 이형훈 배우 역시 대사로 표현되지 않는 레오폴드의 감정선을 눈빛과 어조로 섬세하게 그려낸다.
개인적으로 <네버 더 시너>라는 작품은 '사형제도의 찬반'이 아니라, 용서받을 수 없는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논한다고 본다. 즉, 죄와 죄인을 구분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그 논점이 사형제도 자체로 맞춰져있는 것 같다. 게다가 이미 사형 반대 입장에 더 힘을 실어 관객에게 답까지 정해 준 듯하다. 작품을 맡은 변정주 연출도 인터뷰를 통해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밝혔던데, 그래서인지 연출의 판단이 미리 극 속에 잠복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대로우 변호사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차분한 반면, 크로우 검사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도 감정적으로만 몰아붙인다. 두 사람의 대결에 있어서도 계속 대로우가 유리하고 우월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그래서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 아주 객관적으로 본다면, 대로우는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이다. 명백한 유죄를 인정하면서 어떻게 사형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모두의 관심은 대로우의 초조함을 따라가지 않을까? 그래야 마지막에 이르러 더욱 반향이 커진다. 그게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심지어 연극은 최후 변론이 끝나고 나오는 에필로그 신을 아름답게 그린다. 이것 역시 한번 더 두 사람의 존재에 의도적으로 힘을 실어준 미장센으로 보인다. 하지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해선 안된다 Hate the sin, never the sinner는 말이 극 속에서 설득력을 가지려면, 두 인물 속에서 보여주는 편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롭이 엄마를 계속 찾으며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결핍을 보여주려고 한 듯하나, 그리 크게 와 닿지는 않는다. 니체의 초인론을 들먹이면서 (솔직히 이론은 방어적인 핑계 아닐까) 레오폴드가 기꺼이 공범이 되는 과정은 <쓰릴 미>를 보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그렇다면 <네버 더 시너>는 그저 <쓰릴 미>의 친절한 해설판인 셈인가? 과연 <쓰릴 미>를 보지 않고 <네버 더 시너>에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네버 더 시너>가 정말로 관객에게 정의의 판결을 돌리고 싶었다면, 조금 더 관객이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을 줄 필요가 있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