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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애할 권리 Apr 28. 2018

연극 <엘렉트라>

<엘렉트라>

소포클래스의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않은 지라, 원작과의 비교는 하지 않겠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캐릭터와 내용은 알고 있었고, 딱 그 정도 선에서 이번 작품을 봤다. 어차피 각색의 비중이 큰 작품이었으니. 한태숙 연출과 고연옥 작가는 이 작품의 시대를 현대로 옮겨왔다. 전쟁과 테러, 폭군과 반란과 같은 동시대 문제성을 내비치는 캐릭터를 설정해 현실을 반영했다.


자, 동시대성. 의도는 좋다. 엘렉트라를 통해 개인의 복수를 위해, 신념 하는 정의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고 사회를 망가뜨리는 일이 과연 옳은 가를 되묻는 메시지도 좋다. 요즘 적지 않게 일어나는 무차별 테러에 대한 일침과도 같아서 기대했다. 그런데. 엘렉트라의 복수가 무엇인 지 드러나는 순간, 이 거대한 담론은 빈약해진다. 엘렉트라는 아버지를 죽인 부정한 어머니에게 복수하려고 한다. 엘렉트라가 어머니에게 가지는 감정은 증오이고, 혐오이고, 한편으로는 열등감도 비친다. 엘렉트라는 어머니 클리탐네스트라를 꼬리 치는 여우라는 식으로 비난하는데. 비난의 포인트가 이상하다. 그리고 클리탐네스트라는 자신의 큰 딸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을 토로한다. 그렇다면 엘렉트라가 말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어머니는 조신해야 한다는 건가? 엘렉트라가 여성성을 지운 전사의 이미지라는 점에서 더더욱 정당성을 잃는다. 햄릿이라도 되려고 했던 것인가? 이럴 거면 왜 현대로 끌고왔나?


혹은, 융이 주장한 *엘렉트라 콤플렉스, 사실상 실패한 이론인데.. 여기에 너무 꽂힌 건 아닌지...

*여아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남근(phallus)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부러워하는 한편 자신에게 남근을 주지 않은 어머니를 원망하는데, 이와 같은 여아의 남근 선망(penis envy)이 여아로 하여금 콤플렉스를 갖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며, 이는 여아가 성장함으로써 어머니의 여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편 초자아(超自我)가 형성될 때까지 지속된다.  


더 이상한 것은 남매 캐릭터. 남동생 오레스테스는 제대로 된 역할도 없이 허수아비 같다. 엘렉트라가 자신의 복수에 오레스테스를 이용하려는 것도 사실 좀 석연치 않은데, 그가 등장한 이후로 하는 일이 없어서 더 애매한 인물이 됐다. 작가의 글을 보니, 원작에서는 치밀하게 복수에 성공한 타고난 영웅으로 묘사된다고 했는데, 차라리 그게 나았을 듯. 어머니를 죽일 수 없다고 망설이다가 죽이겠다고 소리쳤다가 어영부영하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더 이상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리려고 한 거냐며...


엘렉트라의 여동생 크리소테미스. 여기서 완전 벌떡 일어나고 싶었다. 일단 크리소테미스는 엘렉트라를 회유하고 어머니의 편에 선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게 원작의 설정이라고...) 이번 작품에서 크리소테미스가 엘렉트라를 비난하는 씬... 자세한 대사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렇게 하고 다닌다고 남자가 되지 않는다, 남자로서 어머니를 처벌하려고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식이었는데. 그리고 자기 자신도 아이기스토스에게 폭력을 당하는 일. 이런 상황들이 맞물려 캐릭터 붕괴를 몸소 보여주는 인물이 됐다.


아이기스토스와 크리소테미스의 이야기를 공들여 넣었던데. 굳이 왜, 그렇게 만들어 놨는지 모르겠다. 크리소테미스가 양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하는 희생자가 되고, 그러면서 아이기스토스를 남성 권력을 악용한 (그래서 벌 받아야 해!라는 건지...) 인물로 보이도록 했다. 하지만 내 가볼 때 그는 권력에 취한 정치인이고. 그런 욕망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인물의 관계와 이야기는 성립한다. 고연옥 작가의 작품을 보다 보면, 가끔 드라마성을 키우기 위해서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아가는, 추악한 측면을 그려낼 때가 있던데... 이번 작품도 그런 부분이 많았다. 게다가 한태숙 연출을 만나 그런 악의 모습이 더 극악스럽게 그려졌고.


제목이 엘렉트라고 주인공이 엘렉트라인데... 엘렉트라 너무 나약하고 흔들리고 떼쓰는 인물처럼 그려내서 아쉽다. 서이숙, 예수정, 박완규... 등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지만. 이미 극 속에서 만들어 놓은 캐릭터가 너무 분열돼서 매력적이진 않았다. 반란군들의 설정도 애매한데. 다들 동기가 약하고. 그들이 작가님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나오면 안되는 거잖아요... 제대로 역할을 했으면 좋은데. 소시민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가니까 가려다 마는 것 같고. 신과 인간에 대한 부분도 거의 이야기하다 만 것 같은.


무대와 조명은 좋았음. 무너진 건물 아래 지하 벙커가 배경이라는데, 그 공간감을 무대가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사실 가볍게 보고 그냥 짧게 후기를 쓰려고 했는데 흥분해서 길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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