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Theatergoer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애할 권리 May 06. 2018

연극 <킬롤로지>

폭력에 의한, 폭력에 대한, 폭력을 위한 게임


Killology by Gary Owen

연극 <킬롤로지>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이 세상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생산하고, 투자하고, 소비하는지 질문한다. 무분별한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이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관성화되는 현상을 비판한다. <킬롤로지>를 쓴 영국 작가 게리 오웬은 2001년 데뷔작 <Crazy Gary's Mobile Disco>부터 꾸준히 폭력 문제를 주제 삼아 왔다. <킬롤로지>는 오웬이 2017년에 발표한 최신작이다. 웨스트엔드 초연 당시에도 호평받았고, 올해 '2018 올리비에 어워드 작품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국내에서도 비교적 빠르게 초연된 셈이다.





- 이후의 글은  <킬롤로지>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오웬은 살인에 대한 시뮬레이션(가상의 경험)이 실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다룬 책 <On Killing>에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썼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같은 인간을 죽이는 행동을 거부하고, 혐오를 느낀다. 그런데, 왜 현대에 와서 서로 총을 겨누고 죽이는 걸까? 전쟁터에 나가 훈련하는 군인들에게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작가는 극 속 알란의 입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한다. '죽이는 것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과정에서 결국 나중에 몸이 먼저 반사적으로 반응한다'고. 이성적 판단, 도덕적 판단을 하기도 전에 이미 총알은 발사 돼 상대의 몸을 통과하고 있다.


게임의 원리는 보상에 있다. 미션을 성공하면 레벨업, 점수, 캐시 등의 형태로 큰 보상을 받는다. 게임 속 보상은 그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부와 권력을 준다. 유저는 그 보상을 얻기 위해 게임을 반복한다. 반복은 중독이 되고 관성으로 이어진다. 게임에서 실패하면 전부 잃지만,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일단 한번 망가지면, 망가지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 <킬롤로지>는 폭력이 폭력을 낳으며 현대인에게 세습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에 부자간의 유착을 대입한다. 부모의 무관심과 무책임이 자식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세 인물을 통해 경각심을 준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가정에서 아버지가 해야 할 역할을 하지 않았을 때 초래하는 결과를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대부분 어머니에게 양육의 책임을 묻고,  모성의 결핍과 부재에서 오는 갈등을 그린 작품이 많다는 것을 떠올리면, <킬롤로지>는 양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이란 새로운 측면을 비춘 셈이다.


Killology - 영국 공연 장면

Allan - Davey - Paul

'킬롤로지'라는 게임을 개발해 억만장자가 된 폴.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울분을 풀기 위해 이 게임을 만들었다. 폴이 만든 '킬롤로지'라는 게임은 타겟을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만드는 롤플레잉 게임이다. 타겟을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이면 점수가 낮고, 극악무도하게 고통을 가할수록 높은 점수를 획득한다.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관장하며 상식 밖의 폭력을 행하는 것. 아무리 가상의 게임이라 해도 도덕적인 심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당연히 논란이 오갔고, 그러는 사이. 결국 게임의 피해자가 생겼다. '킬롤로지'의 게임대로 폭력(플레이)을 행세한 이들 때문에 어린 소년이 사망한 것. 피해자는 데이비라는 이름의 10대 소년이다. 데이비의 아버지 알란은 데이비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그는 폴에게 항의 메일을 보내고, 소송도 해보지만 성과가 없다. 폴은 게임은 게임일 뿐이고,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알란은 복수를 계획하고, 폴의 집에 잠입한다.  

(c) 연극열전

Davey

<킬롤로지>는 알란, 폴, 데이비 세 사람의 입을 통한 독백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폭력은 전부 '말(대사)'로 전해진다. 대게는 과거 형이다. 관객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말을 통해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주관성이 가미된 인물의 심리를 다층적으로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그 중 데이비는 실존 여부가 모호한 인물이다(어쩌면, 무대에 서서 말하고 있는 데이비는 실제가 아닐 지 모른다). 데이비가 18개월일 때, 아버지 알란은 집을 떠났다. 그때부터 데이비는 가난한 환경에서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엄마와 함께 살았다. 데이비가 9살이 되던 해, 알란은 생일 선물로 메이시라는 개를 데려온다. 자신이 곁에 있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려는 듯. 그리고 그날, 데이비는 알란에게 처음으로 '아빠'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날 이후, 다시 알란을 만나지 못한다. 데이비는 밖을 다니는 것 자체가 공포인 동네에서 무방비 상태로 자란다. 엄마에게 기대하는 것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을 위협하는 자에게 굽히는 것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쌓이고 쌓인 데이비의 화는 약자에게 왜곡된 형태로 분출된다. 불량배들에게 당해 메이시를 잃고, 자신을 위로한 선생님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도 그 예다. 어느 누구도 불안과 공포로 흔들리는 데이비를 잡아주지 못했다.

(c) 연극열전

Paul

폴의 성향은 아버지와의 소통불화에서 비롯된다. 폴의 아버지는 폴을 인정하지 않는다. '넌 부자인 아버지에게 태어난 것만으로도 성공한 거야. 그런데 넌 그걸 낭비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식이다. 어느 날 폴은 가족과 떠난 이집트 여행 중 큰 사고를 당한다. 부상을 입은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폴은 큰돈을 지불한다. 하지만 그 덕에 목숨을 구한 아버지는 오히려 폴에게 호통을 친다. 정의롭지 않았고, 낭비적인 일이었다고. 폴은 돈으로도 아버지의 사랑을 얻을 수 없었다. 원칙을 중시하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수성가한 보수적인 아버지 눈에 폴은 그저 헛짓거리를 일삼는 문제아였다. 폴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밤하늘의 별을 본 날을 기억한다. 반짝이는 별을 본 폴은 아버지에게 '저 별에 갈 수 있냐'고 물었고, 이에 아버지는 '넌 뭐든 할 수 있어'라고 답한다. 그때부터 폴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강한 신념을 가졌다. 학교도 가지 않고, 게임만 하면서 뭐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아마도 그런 행동이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만들었을 거다. 하지만 폴이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누구도 옳은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c) 연극열전

Allan  

알란은 데이비가 세상을 떠난 후, 큰 죄책감에 빠진다. 아내는 종교에서 위안을 얻지만, 알란은 현실과 싸우기로 결심한다. 알란은 우직하게 일하는 하층민  노동자다. 폴과 만났을 때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를 친다든지, 복수의 순간에 울음을 터뜨린다든지, 작품은 그를 냉철하고 강하게 보여주기보다 연민의 시선을 실어 묘사한다. 어쩌면 그는 무분별한 폭력에 대항하는 희생자들의 대변인일지 모른다.


<킬롤로지>의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지 않고 뒤죽박죽 섞여있다. 때문에 관객은 인물의 말을 조합해 인과관계를 추적한다. 이들은 중대한 순간을 회고하며 만약을 가정한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과정에서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하고, 어떤 부분에 가서는 진실이 충돌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알란과 데이비다. 둘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혹은, 실제가 아니다). 대부분 독백/방백으로 흐르는 이 작품의 중심에는 2번의 '사건'이 일어난다. 인물과 인물이 만난 실제 상황이 펼쳐지는 (관객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씬이다. 하나는 알란과 폴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알란과 데이비의 만남이다.


알란은 초반에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그 사건이 알란의 복수, 즉 폴에게 찾아가는 동기가 된다. 관객은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 알란이 데이비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데이비의 죽음 - 알란의 복수'의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그런데, 데이비의 독백을 계속 따라가 보면, 그는 살아있다. 불량배들에게 폭행당한 뒤, 가까스로 재활하고 회복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더욱이 적극적으로 변화의 의지를 내비친다. 그렇게 성장한 데이비는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고, 병원에 실려온 알란을 만난다. 알란은 화재로 연기를 많이 들이마셨고, 상태가 좋지 않다. (바로 앞 장면에서, 알란은 폴의 집에서 역습당한다. 그 사실을 안 관객은 데이비가 알란을 만나는 순간이 혼란스럽다. 하지만 둘의 대화로 짐작했을 때, 알란이 병원에 온 이유는 폴과는 관계가 없다. 즉 다른 시공간인 것이다) 데이비는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7주 동안 그를 돌보았다고 말한다. 더욱이 아버지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나던 날을 생생하게 회고한다. 데이비의 말대로라면 '데이비의 회복 - 알란과의 재회'라는 인과관계가 생긴다. 알란을 중심에 두고 절대로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전자가 진실인 쪽에 더 힘이 실린다. 알란은 데이비가 죽고 난 후, 계속 그의 꿈을 꾸고, 모든 신경이 데이비에게 쏠려 있는 상태니까. "그때 내가 손잡아 줬다면 뛸 수 있었을 아이의 모습을 꿈꾼다"는 대사도 그렇다. 후자는 알란의 환상이거나, 죽은 데이비의 영혼이 꿈꾸는 모습일지 모른다. 하지만, 관객으로서 후자가 진짜 현실이길 바라는 염원도 갖게 한다.

Killology - 영국 공연 장면

Star

사랑은 두려움을 내제 한다. 사랑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렵고, 사랑을 잃을까 봐 두렵고, 사랑이 나를 변하게 할까 봐 두렵다. 그 두려움을 밀쳐내는 힘은 믿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은 점차 희미해진다. 연극의 마지막, 데이비는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해 달려간다. 그 별은 폴이 가고 싶었던 별이고, 알란의 바람이 담긴 별이다. 별은 밝다. 별로 가득한 하늘도 밝다. 다만 별이 너무 멀리 있어서, 그 실체를 모르는 탓에 밤하늘이 어둡게 보일 뿐이다. 조금 더 다가가면, 분명 반짝이는 빛을 만날 수 있다. 사람도 결국 마찬가지다.  



Actors

알란 역을 맡은 김수현은 참회와 분노, 슬픔과 희망의 감정을 '알란'의 얼굴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았을 법한 척박한 삶의 흔적이 어눌하면서도 순박한 말투에 묻어난다. 첫 시작을 여는 대사를 알란이 하는데, 그 순간 관객이 궁금증을 가지고 이야기에 집중될 수 있게 끌어당긴다. 사실, 그의 연기를 좋아한다. 꽤 오랜만에 본 느낌인데, <리처드 2세> 이후에 처음인가? 이전에 창작극 할 때 더 많이 챙겨 봤었는데, 현실 밀착형 인물을 굉장히 잘 표현한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지만, 쉽게 드러내거나 내색하지 않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대사 뒤에 숨은 의도를 표정(특히 눈빛)과 말의 여운으로 완성한다. <연애시대> 때 연기를 그래서 좋아했다. 이번 작품을 보면서 이전에 인상 깊게 봤던 연극 <사랑이 온다>도 떠올랐다(그 작품도 폭력의 대물림에 대한 내용이었던 기억). <킬롤로지>는 분명 김수현에게 또 하나의 대표 작품이 될 듯!


폴 역할을 맡은 김승대 배우는 요즘 연극 무대에 더 자주 서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예전보다 연기 밀도가 높아졌다. 폴이야 말로 이 작품에서 감정의 기복이 큰 인물인데, 그 흐름을 유연하게 잘 타며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납득할 수 있는 감정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 도시적이고 귀공자 같은 외모도 폴의 캐릭터와 잘 어울렸고.


데이비 역의 이주승 배우는 이번 작품에서 처음 봤다. 영화나 방송 쪽에 더 많이 활동하는 배우 같은데, 내가 TV를 안보니 이제야 알게 된 셈. 불안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불완전한 10대 소년의 모습을 잘 드러냈고, 과하지 않은 듯 건조한 (요즘 말로 무심한 듯 시크한) 느낌이 데이비와 잘 맞았다.


알란과 폴, 데이비. 세 배우의 연기 결과 에너지가 전부 다른데 극 속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엄청난 양의 독백으로 가득한 대본의 무게를 견뎌낸 왕좌들! 이 작품은 배우가 캐릭터와 완전히 하나가 되지 않으면, 긴 대사가 자기 설명에 머물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대사를 외우는 것보다 오히려 자기 안에서 합리적인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게 더 어렵지 않았을까? 여러모로 리스펙!


Stage

이번 공연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무대다. 극의 분위기에 비해 무대가 너무 말끔하고 밝고 매끈하달까? 의자나 거울도 그 상징적 의도가 너무 1차적인 선에서 드러나는 듯하다. 조금 더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는 대본인데, 비교적 단순하게 간 느낌이다. 사운드의 활용도 조금 매끄럽지 못했는데, 음향이 삽입될 때마다 극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 같아서 튀었다. 뚝 끊기는 느낌도 너무 강했고.  


<킬롤로지>는 3명의 인물을 1인칭 시점으로 둔 작품이기 때문에,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과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모든 해석이 타당할 수 있는 개연성을 영리하게 심어두었다. 때문에 공연을 다 보고 난 후에도, 관객은 계속 작품 안에 머물고 싶어진다. 계속 더 많은 해석과 다양한 감상이 쏟아지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연극 <엘렉트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