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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식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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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쑤 Mar 16. 2018

녹보수: 웃으니까 행복하다

아침 출근길에서 이미 하루치의 에너지를 모두 써버린 듯, 회사에 도착하여 내 자리에 앉자마자 그대로 퇴근해버리고 싶은 날이 있다. 아니 아예,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날, 혹은 출근 준비를 다 마쳐놓고서도 문 밖에 나서기가 싫어서 그냥 주저 앉아 멍하게 있는 날도 꽤나 자주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 내키는 때마다 퇴근하거나 아예 결근하거나 할 수는 없으니,  일단은 꾸역꾸역 출근을 하고 출근을 해서는 더디 가는 시계를 원망하며 하루를 소비한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아직 하루가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푸욱 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첩첩이 쌓여가는 이메일은 들여다보기도 싫은 반면 목적없이 열어놓은 인터넷포털이 띄워주는 잡다한 글과 사진들을 하릴없이 들쑤셔댔다. 무언가가 성에 차지 않았다. 게다가 요 며칠 신통치 않은 배변 활동이 다시금 불편한 느낌을 생산해냈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 사람들은 출근 후 간밤의 숙취로 힘들 때 오전 시간에 몰래 자리에서 빠져 나가 회사 앞 ‘의원’에 가서 신묘한 ‘링겔’을 맞고 오곤 했다. 포도당링겔에 무슨 비타민인가가 추가된 것이라고 했다. 나도 몇 번인가 링겔주사를 꼽고 가느다란 침대에 한시간 반 정도 누워 꿀잠을 자고서는 온 몸이 날라갈 것 같은 가뿐함을 느끼곤 했던 것 같다. 숙취에 링겔이라면, 어제 같은 ‘로우 (low)’ 상태에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정확한 답이 무엇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가정상비약처럼 이럴 때 종종 써먹는 나를 위한 방법은 도서관으로 숨는 것이었다. 게다가 다행히 내가 다니는 회사의 건물 지하층에는 작기는 하지만 공공 도서관이 있다. 최근 ‘소확행’이라는 말이 즐겨 회자된다던데, 남들이 듣고는, 에게 그게 뭐야, 할 정도로 소소하고 별 볼일 없어보이더라도 내 자신이 잠시라도 기분 좋고 즐거울 수 있는 확실한 ‘꺼리’가 있다면 그게 소확행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내게는 도서관에서 익명성을 누리면서 빽빽히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보고, 그 중에 한 권을 꺼내 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 조용히 읽는 것이 소확행인가 보다 한다.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한숨쉬며 퍼져 있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생각이 들게 하여 모종의 자극이 되기도 한다. 배가 고플 때 밥을 찾듯 머리가 고플 때 책을 찾는 것 같고, 적당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속에서 느끼는 어쩔 수 없는 외로움과 구속이 버거울 때 아예 서로 무관심한 것이 당연한 타인들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덜 외롭고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과 같다.


어쨌든 그래서 나의 로우모드를 해소하고자 도서관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도서관 안에 들어서서 책을 들춰보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예상치 못하게도 자연의 신호가 왔다. 앞서 썼듯이 최근 며칠 간 배변이 신통치가 않아서 영 개운치를 못했는데, 도서관에 내려오기 전 후다닥 먹은 김밥과 사발면이 그 짧은 시간 안에 나의 뱃 속에서 모종의 화학작용을 한 모양이었다. 뱃속이 부글거리고 다소간의 가스가 자꾸 새나와서 사람 없는 서가를 골라다니며 서가 사이를 요령껏 이동했다. 변비끼가 있을 때의 가스는 내 몸에서 나왔음을 극구 부인하고 싶을 정도로 희한한 냄새를 풍기므로 한 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글거리는 가스가 연속된다 싶을 때즈음,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서가에 다시 꼽고는 아주 급박한 걸음으로 도서관 내 화장실을 향했다. 그리고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볼 일을 보고 화장실을 나설 때 느껴지는 내 몸의 상쾌함과 가뿐함이란, 몇 만원씩 주고 예전에 맞았던 비타민링겔의 효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늘 아침에 컨디션 난조로 인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나를 한숨 쉬게 했던, 내 현재에 대한 답답함이며 내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며 내 삶에 대한 이런저런 씁쓸한 생각들이 결국은 변비 때문에 모락모락 기어나왔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쾌변의 느낌은 정말이지 ‘쾌’하다.


처음 도서관에 내려와서 서가의 책을 들춰볼 때의 기분이, 이런 건 읽어서 뭐해, 하는 심드렁함이었다면, 개운하다 못해 ‘깨운’한 기분으로 화장실을 나와 다시 서가의 책을 들춰볼 때의 기분이란, 어머 이런 책이 다 있었네, 하는 끊임없는 감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싱글벙글하고 있으려니, 아,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촉촉하게 적시는 것이 행복인가, 육체를 활기차게 유지하는 것이 행복인가. 아니, 질문을 바꿔서 더 ‘나은’ 행복이란 것이 있는가. 나는 분명히 지적인 즐거움을 지향하는 인간이었는데 이제 보니 나를 좌우하는 것은 육적인 편안함이 아닌가. 그런데 가만, 그게 잘못된 건가…?


사람은 책을 보며 깨달음의 기쁨도 누리지만 좌변기에 앉아 쾌변의 기쁨도 누린다. 학문과 항문을 동시에 누리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혹은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크게 볼 때 삶에는 이렇게 두 종류의 행복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등장하고,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더 크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데, 대체로 우리는 전자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 같다. 정신적인 것이 더 고매하고 이성적인 것이 더 훌륭하거나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인식을 편견이라고 한다면 나도 이러한 편견에서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정신적으로 향유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당연히 더 옳고 더 좋고 더 높은 가치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나이 탓일까. 아직도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영역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긴 하지만, 점차로 슬금슬금 육체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에 탐닉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우리집 거실에 있는 식물 녹보수를 보면서도 이따금씩 행복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곤 한다. 녹보수가 해피트리라는 이름을 가진 식물과 아주 많이 닮아 있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아마도 녹보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고, 녹보수가 해피트리라는 이름 푯말을 꽂고 팔리는 경우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집 녹보수를 집들이 선물로 가져왔던 지인도 아마 이 녹보수를 해피트리로 알고, 이름에 행복이 들어가 있으니 집들이 선물로 안성맞춤이라는 판매자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녹보수와 해피트리의 차이점을 비교하여 써놓은 글들도 심심찮게 보이곤 하는데, 마치 진짜 해피트리를 키워야만 ‘해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집 녹보수는 여러개의 잎들이 굵은 가지에 매달려서 이쪽 저쪽으로 양팔 벌린 듯 날개를 펼친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굵은 가지들이 이쪽 저쪽으로 방향을 바꿔 층층이 쌓여 감으로써 풍성해지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집 녹보수는 바벨탑이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중심이 되는 나무 몸통이 얼핏 봐도 확연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분갈이할 때 몸통을 좀 곧추 세워주려고 해봤는데, 한 번 기울어진 후 그대로 굳어진 듯하다. 그렇긴 해도 양팔 벌린 가지와 거기에 매달린 윤기나는 녹색 잎들은 얼추 비슷한 무게와 모양과 덩치를 갖추고 양쪽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녹보수를 키우는 내가 이쪽 저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과는 달리, 훌륭한 행복 하찮은 행복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 그렇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녹보수를 보면서 새삼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마다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금 더 행복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영역이 있겠지만, 행복은 어디까지나 정신과 육체 두 영역이 녹보수의 벌려진 양팔처럼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라고.

새끼손톱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새순이 솟아나 어느 샌가 큼지막한 잎으로 자라면서 그런 잎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가지가 양팔 벌린 듯 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녹색 보석같은 나무, 녹보수라는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식물마다 제각기 매력이 있지만, 녹보수는 (그리고 해피트리도 이 점에서는 비슷한데) 풍성한 나무의 느낌이 물씬한 식물이라고 생각한다. 햇살 좋은 날 거실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녹보수를 올려다보면, 여름날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그늘에 드러누워 나무를 올려다 보면 하늘이 온통 나뭇잎에 덮여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들어 참 좋다.


어떻게 살면 행복할 것인가, 뭘 하면 행복할 것인가, 아니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에 대한 물음과 답변은 끊임이 없다. 나 자신의 내면에서도 그렇고 나의 주변 사람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와 지구별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갈망한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결론 아닌 결론으로써,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라는 말을 하고자 한다. 헌법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인간이지만, 추구하던 행복이 드디어 얻어졌을 때 웃으려고 하지 말고, 옛다 일단 웃기부터 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 싶을 때도 그냥 웃자. 생각해보면 어른이 되면서부터 웃음이 얼마나 줄었는가. 알맹이 없는 농담 따먹기 수다라도 어깨를 들썩이고 하하하 소리를 내면서 웃고 나면 얼마나 개운한가. 억지 웃음이라도 실제로 신체상의 여러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 결과들에 의해 밝혀진지 오래인 것 같다.


행복하고 싶다라는 생각과 행복이라는 목표를 두고 이리 재고 저리 재고, 기다림과 노력으로 인내하기만 하지 말고 일단 웃자. 행복이란 이런 이런 것이다 라고 미리 박아두지도 말고, 타인과 사회가 짜놓은 것을 빌려오지도 말자. 행복이라는 것은 해피트리를 집에 놓아두면 요이땅하고 행복하기 시작해서 언제까지고 쭉 행복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고정된 소유물이거나 딱 부러지게 갖춰진 정답과 같은 것이 아니라, 새순이 돋아나서 큼지막하게 자랐다가 시간에 따라 시들어 사라지는 잎새와도 같이 생과 사의 사이클을 지닌 생물과도 같다는 생각도 든다. 행복이란 쨘하고 나타나는 어떤 완전체와 같은 선물보따리가 아니라, 새순을 기다리고 새순이 커나가며 반짝이는 것을 보고, 새순이 어른이 되어 다시 새순을 키워내는 것을 보는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이고 감동일 것이다. 또, 항시 변화하고 움직이는 생물이기에 예전에는 별 의미 없던 것이 현재에 이르러 큰 의미를 갖을 수도 있고 그 반대로 행복할 것이라고 과거에 기대했던 일들이 현재에 이르러 행복한 느낌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책을 읽다가 뜻밖의 깨달음을 얻으면 즐거움에 온 방을 뛰어다니기도 했다는 누군가처럼 즐겁게 웃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꿀잠을 자고 쾌변을 보고 난 후 싱글벙글 콧노래도 흥얼거리자. 녹보수의 새순이 나면 그 앙증맞음에 깔깔 대고, 새순이 성큼 자라나면 그 신통함에 미소짓고, 언뜻 눈에 띈 예전의 녹보수 사진에 비해 지금의 녹보수가 엄청 커 있음을 알게 되면 후와, 하면서 감탄을 하자. 더 좋은 것과 덜 좋은 것, 고상한 것과 경박한 것을 가리지 말고 일단 웃자. 이건 이래서 좋으니 웃고, 저건 저래서 좋으니 또 웃고, 자꾸자꾸 웃자.


내가 요즈음 나 자신에게 가장 많이 자주 하는 말들이다. 아직 완전히 탈바꿈하지는 않았으나, 많이 웃으려 하다 보니 아주 약하게나마 우주의 기운이 나를 중심으로 모아지는 느낌이 든다. 웃으니까 행복하다..!



식물생각 핸드북


간단 프로필


국내 유통명: 녹보수

학명: Radermachera Sinica

영명: Emerald tree, Asian Bell Tree

생물학적 분류: 속씨식물문 쌍떡잎식물강 꿀풀목 능소화과

원산지: 중국 남부 및 타이완


햇빛:

베란다에 면한 거실창 근처에 들어오는 햇빛이면 적당한 것 같다. 햇빛이 비칠락말락한 방 안에서 키워도 살기는 하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생기가 없어진다.


바람:

이것도 역시 거실창 근처에 두는 것이 적당한 것 같다. 노상 바람이 불어오지는 않는다 해도 창문이 열릴 때마다 환기와 통풍이 되는 정도는 필요하다. 햇빛의 부족보다 바람의 부족으로 인한 벌레 생길 위험이 더 큰 것 같다.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말라보인다 싶으면 속흙을 쑤셔볼 것 없이 물을 주었다. 물주기는 별로 까다로울 것이 없는 식물인 것 같다.


내한성/월동:

원산지를 망각하고 내 고집을 부리다가 재작년 겨울에 한몸살을 앓게 했다. 베란다에 두고 키우더라도 겨울에는 꼭 거실로 들여놓는 것이 좋겠다. 나의 녹보수는 한겨울을 베란다에서 보내고서 죽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죽을동살동 하는 것 같다.


성장:

처음 집들이 선물로 우리집에 왔을 때와, 그 이후에 찍었던 사진들을 보면 참 많이 컸다. 3-4년 사이에 몸집이 세 배는 되었을까. 이번 해에 새로 나온 초록 가지는 다음 해가 되면 누렇게 목질화가 되어 새로운 초록 가지를 낸다.


번식:

아는 바가 없다.


매력포인트:

광택이 흐르는 녹색 잎이 풍성하게 매달려있는 모습 자체가 매력이다. 아파트에 사는 도시인이 집 안에서 '나무 느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대표적인 식물일 것 같다. 거실에 놔두면 키우기에 까다롭지도 않고, 잎이 주렁주렁하니 공기정화능력도 적지 않을 것이다.


유의사항:

겨울을 조심하고 흰 벌레 (깍지벌레)를 조심하자. 겨울에는 영하 이하의 장소에는 두면 녹보수에게 좋지 않다. 통풍이 좋지 않을 때 벌레가 생기기 쉬운데, 휴지 보풀이 묻었나 싶게 허연 점 같은 것이 보이면 하나하나 찝어내고 샤워도 시켜준다. 벌레가 창궐하면 잎이 누래지다가 힘없이 툭툭 떨어지는데, 정 해결이 안 되면 쌩쌩한 잎 한두개만 남겨두고 삭발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2년여전 봄에 이랬더랬다.


보너스:

해피트리와 굳이 구분을 하고자 한다면, 여러가지 차이 중에서도 가장 확연한 차이점은 나무 몸통의 표면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해피트리의 나무 몸통은 파인 홈들로 덮여 울퉁불퉁한데 반해 녹보수의 나무 몸통은 비교적 굴곡없이 반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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