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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Aug 15. 2023

사람들은 극장에 모인다.

어느 극작가가 말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똑같다. 사람들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 극장에 모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화는 꼭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게 세르히오 블랑코와 같은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극장을 좋아한다. 10대 시절부터 꾸준히 그랬다. 고등학생 시절엔 할아버지 인맥을 이용해 영사실에서 영화를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엄마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일을 극장구경이라고 표현한다. 영화만 보는 것 분 아니라 극장 문화를 다 아우르는 말인 것 같다. 엄마는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영화를 보러 가는 일도 흔하다. 예매를 하면서 "이거 무슨 영환 줄 알아?" 하고 물으면 "몰라. 그냥 가"라고 답한다. 엄마에겐 영화 자체보다는 극장에 가서 사람들과 어울려 같은 극을 보는 상황이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난주 알쓸별잡을 보다가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시네마스코프와 규모가 큰 영화가 유행하던 시기에 개봉했던 십계, 벤허는 내가 어린 시절 엄마가 수없이 반복해서 보던 영화였다. 아마도 그 영화들이 주었던 최초의 충격과 경험 때문에 엄마는 그런 류의 영화와 극장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분명히 영화를 "본다"는 것 이상의 총체적인 경험이다.


엄마에겐 영화 자체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분명히 그렇다. 엄마가 본 영화들은 빠르게 휘발되고 때론 두세 개의 영화들이 뒤엉켜서 하나의 영화로 기억되기도 한다. 봤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영화도 수두룩하다. 영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가끔은 효도영화관람을 한다. 엄마와 우리 자매의 영화취향이 썩 다르기 때문에 엄마를 위해서 취향을 포기하고 극장에 가는 경우인데, 이럴 때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안 된다. 모두가 기꺼이 취향을 희생해야 한다. 기껍지 않더라도 희생해야 한다. 엄마는 누구라도 빠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해야 한다. 세르히오 블랑코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엄마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극장에 가는 것이다. 우리를 모두 다 이끌고. 어떤 영화인지는 여전히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영화가 중요하지 않을 거면 취향도 뚜렷하지 않을 순 없는 걸까. 엄마는 블록버스터나 SF, 혹은 액션 영화를 좋아한다. 최근에 아바타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면서 다음 시리즈가 언제 나오는지 물었다. 벌써 두근거린다나. 그런 엄마랑 웨스앤더슨 영화를 보러 갈 순 없다. 최근엔 엄마가 좋아하는 인디아나 존스 5도 봤고 밀수도 봤다. 영화를 보고 나면 가장 중요한 건 엄마가 재미있게 봤느냐이다. 엄마가 고른 영화도 그렇지만 엄마가 고르지 않은 영화, 그냥 극장에 가고 싶어서 알아서 매해라고 나에게 맡겨버린 영화라면 더욱 그렇다.


올해 봤던 어떤 영화는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나와버렸다. 길기도 긴데 영화 시작부터 예상보다 조금 힘들다는 느낌이 왔지만 '그래도' 하는 마음으로 한 시간 반을 더 보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동생은 앞으로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친구를 하고 싶지 않다고 까지 했다. 불쾌한 감정을 털어내기 위해 열심히 투덜거리는 와중에 엄마가 말했다. "항상 성공할 순 없지. 다음엔 재밌는 거 보자."


엄마에겐 영화자체보다는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와서 우리가 함께 했다는 경험 모두가 중요하니까 영화가 좋지 않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인생에서 실망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만 지독하게 사랑하는 것보다 그것을 둘러싼 여러 가지를 두루두루 사랑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덜 실망하는 방법이다.


우리의 다음 영화는 오펜하이머로 정했는데, 과연 엄마의 마음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 엄마는 실패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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