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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Jan 31. 2024

의미와 기록과 장치

간헐적으로 방문하는 한 배우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연말부터 여행 관련 포스팅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해 마데이라 제도, 카나리 제도를 돌아 스페인 세비야로 가는 여정을 미리 공개했을 때 이미 기대가 한껏 차올랐는데, 여행이 시작되고 올라오는 사진과 영상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마치 내가 보고 있는 걸 알고 있는 듯이 마음에 쏙 드는 이국적 자연 풍광이 계속 올라왔다.      


해안가 드라이빙 코스 위에서나 산책길 위에서, 산 정상에서, 나무로 둘러싸인 정원 한가운데서, 발아래 펼쳐진 선인장 정원에서 그녀의 행복감이 전해졌다. 대서양의 태양 볕이 만드는 기묘한 매력이 가득한 사진을 보며 그녀의 여행이 가급적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타인의 여행을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지켜본 일은 오랜만이었다. 하루라도 업로드가 없으면 벌써 여행을 끝낸 것은 아닌지 아쉬웠다. 포스팅을 부지런히 해달라고 DM을 보내볼까 두 번이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여행을 마치고 올린 듯한 책의 한 구절마저도 여행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상대편 코트로 날린 공이 네트를 넘어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한 가지 진전이었다. 의미가 있는, 아마도 바람직한 진전."     


그녀의 멋진 여행 기록 덕분에 나도 최대치의 대리만족을 즐겼다.     


한때는 기록 강박이 있는 사람처럼 다시 들춰보지도 않을 정보나 생각들마저 기록하곤 했는데, 점점 기록하는 습관이 삭제되더니 가끔 쓰는 에세이만 겨우 남게 되었다.     


다시 기록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긴 글로 남기기엔 애매하지만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그날의 문장들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일부러라도 기억할 순간을 짚어주고 그곳에 이벤트 플래그를 세우고 싶어서 기록을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주간 좋은 일이다. 대단한 일을 기록하려는 게 아니라 연말에 올해의 이벤트를 꼽아볼 정도는 될 수 있게 기억의 소재를 모으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월 첫 주의 좋은 일은 엄마랑 오랜만에 단둘이 영화를 본 것. 2주의 좋은 일은 일요일 조식으로 떡볶이를 먹은 것이다. 이렇게 일 년을 보내면 밋밋한 듯 보이는 한 해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서 기록도 시작했다. 목록뿐이지만 꽤 유용하다. 여기까지 더 읽어야지. 이번 주에 이만큼은 읽어볼까 하는 자극이 된다. 러닝 하는 사람에게 러닝앱이 필요하듯 책 읽는데도 독서앱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독서앱의 또 다른 장점은 내가 영 의미 없는 한 달을 보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독서앱 덕분에 1월에는 시리즈 중 마지막 권의 절반을 남겨두고 몇 년 간 멈췄던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을 드디어 끝냈다. 읽었던 절반이 기억나지 않아 4권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몇 마디로 정리하고 말 책이 아니지만 책을 읽은 후 ‘인생에 닥치는 불행들은 사실 불행이 아니다. 인생에 대한 큰 오해가 여기에 있다. 불행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평범한 일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불행이란 커다란 사건이 하필 나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일어나야 할 불행이 나를 비껴가는 것이 외려 행운이라는 것.      


두 달째 인후염과 코로나, 독감을 돌아 다시 인후염을 앓고 있다. 잃어버린 인형에서 시작해 잃어버린 인형으로 돌아온 페란테의 책을 이제 막 다 읽었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니) 12월에 코로나 때문에 약속을 취소했던 친구에게 이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렸더니 자신도 대단한 1월을 보냈고 수면제를 처방받았다고 했다. 곧 사실은 불행이 아니라 일상인, 그러나 만만치는 않은 일상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주간 좋은 일>과 같은 취지로 일상 속 장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지난주엔 동생과 이야기를 나눴다. 예를 들면 몇 년 후 다가올 엄마의 칠순에 가족 모두가 만족할만한 여행을 떠나는 것. 그런 목표를 정해두고 매달 돈을 조금씩 모으는 것. 그런 게 다 의미가 된다. 우리는 지난 태국 여행을 가기 전에도 매달 통장을 확인하면서 "이제 두 명 비행기 탔어" "이제 공항에 다 내릴 수 있어" "이제 방콕에서 한 명 호텔에 체크인했어"같은 말들로 웃었다. 


며칠 전에는 동생이 방콕에서의 마지막 날 저녁을 먹은 식당에서 너무 많은 메뉴를 주문했던 일을 후회한다고 했다. “그때 너무 배고파서 사치를 부린 것 같아.” 엄마는 꾹 참았던 말을 터트리듯 “그래, 다음엔 그러지 마.”라고 말했다. 우리는 여행에 대해 말할 때면 주로 다퉜던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 아무래도 여행을 오랫동안 곱씹고 즐기려면 싸우는 게 중요한 가보다. 이건 어쩌면 불행인 줄 알았던 일상과 같은 맥락일까. 어떻게 싸워야 잘 싸웠다고 오래오래 뿌듯해할지 고민해야겠다.


엄마의 칠순에 포르투갈로 떠난 배우 같은 여행은 못하겠지만 엄마가 좋아하는 화려한 인공조명이 만드는 야경을 볼 순 있을 것이다. 그게 어디든. 동생이 좋아하는 조금 냄새는 나지만 멋을 잃지 않은 옛 건물들 사이를 걸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걸으면서 싸우는 거야. 그런 것들을 잘 기록해 두면 또 두고두고 열어보면서 의미를 덧입히면서 좋아하겠지. 그때도 오래 기억에 남도록 잘 싸워야겠다.      


당장은 2월의 의미를 만들기 위해 하기 싫은 일도 해야겠고 숙제와 같은 책들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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