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derPaul Apr 26. 2024

생각하지 말아야지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고 생각한다. 생각 좀 그만해. 당장 멈춰.라는 명령어는 도무지 먹히질 않는다. 산책을 좀 해야겠다. 크게 도시를 한 바퀴 돌면서 생각해야지. 아니 생각하지 말아야지.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 ‘무엇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지?’ 하고 바로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한다. 뇌는 부정어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생각하지 말라는 명령어를 입력하자마자 생각을 멈출 수가 없고 오히려 질주한다. 맙소사.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엊그제는 생각이 꿈까지 쳐들어와서 종일 생각하던 것들이 서로 힘싸움하는 꿈을 꿨다. 개운하지 않은 아침을 맞이했다.


몸을 움직이면 생각을 줄일 수 있을 줄 알고 지난주엔 아침에 눈곱만 떼고 모자와 물을 챙겨 집 근처 산으로 갔다. 마지막으로 이 산에 올랐던 게 몇 년 전이더라. 그때도 올라갔던 길 그대로 내려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예상보다 많이 걸어야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길을 잃지는 않았고 용인할 만한 오차 범위 안에서 헤맸다. 이번에도 나빠 봐야 그 정도겠거니 했는데. 완전히 망했다.


올라갈 땐 시기 좋게 만난 등산팀 꼬리에 어물쩍 붙었더니 내가 아는 길과 영 다른 경로로 정상에 닿았다. 산 이름이 새겨진 비석도 처음 봤다. 여기가 진짜 정상이군. 꽤 빨리 왔잖아. 역시 등산팀 뒤에 붙길 잘했지. 좀 더 멀리 산을 타도 좋을 텐데. 다음엔 더 멀리 가봐야겠다. 하고 왔던 길을 찬찬히 기억해 내며 하산했다. 어느 지점까지는 정확했는데, 어디부터 길을 잃었는지 알 수 없다. 산이란 본디 나무 옆에 나무, 초록 옆에 더 초록 또 비슷한 초록인 데다 이정표가 덜 친절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길이 아닌 거 같은 기분으로 한참 걷다 보니 순식간에 고속도로가 보이고 길이 막혀있었다. 잘라낸 나무를 쌓아 만든 출입금지 표시를 현실에서 만날 줄이야.


와 c. 밤이 아니라 다행이다. 하고 침착하게 지도 앱을 켰다. 하지만 이 넓은 산의 샛길, 특히 내가 잘못 비집고 들어온 길인 듯 길이 아닌 길까지 지도앱에 표시될 리가 없다. 그래도 지금 의지할 수 있는 게 지도앱뿐이라 두리번거리며 왔던 길을 찝찝하게 되돌아 가는데, 멀찍이 양볼이 시뻘건 여자분이 나처럼 당황한 얼굴로 내려오고 있었다. 몇 발자국 차이로 여자분을 스쳐가다가 지금 지나치면 언제 다시 사람을 마주칠지 알 수 없단 생각에 용기내어 말을 걸었다.


"저, 혹시 내려가는 길 아세요?"

"아, 저도 오늘이 처음인데."

"저는 30분째 헤맸는데 길을 영 못 찾겠어요."

"어느 동에서 오셨어요?"

"○○동이요."

"저는 △△동이라 많이 먼데."

"괜찮아요. 우선 산에서 빠져나가고 싶어요."


하고 자연스럽게 그분 뒤에 따라붙었다. 몇 발자국 걷다가 볼 빨간 여성분이 미안한 표정으로 혹시 물이 있는지 물었고 나는 거의 마시지 않고 남은 물병을 내밀었다. 마라톤 10km는 뛴 선수처럼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걸 보고 우리 사이 거래가 완전히 평등해졌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당신이 길을 찾고 나는 물을 공급하고. 공평하다.


짧은 대화를 나누다보니 억양에서 느껴지는 외국인의 향기. 외국인 꼬리에 붙어 길을 찾는 토종한국인이 여기 있어요. 그분 손에도 나와 같이 지도 앱이 들려있었고 나는 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산길을 지도로 읽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앞선 외국인은 내가 방금 전 지나갔던 길을 교묘하게 비켜서 역시나 길이지만 길이 아닌 것 같은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다시 고속도로가 보였고 담벼락 옆으로 걷다 보니 시멘트로 발라놓은 물길이 나왔다. 긴가민가하며 한참을 꿋꿋하게 걸어서 마침내 우리는 산을 빠져나왔다. ○○동도 아닌△△동도 아닌 곳에 떨어졌지만 산에서 무사히 벗어났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었다.


동생은 길이 뻔한데 길을 잃을 게 어디 있냐며 별일 아닌 듯 얘기했지만 혼자 산길을 헤멜 때 심정을 네가 알아? 매번 길을 잃어봤지만 이렇게나 크게 벗어나서 헤맨 것은 처음이었다. 내려오자마자 남은 물을 여전히 볼이 빨간 여성분께 다 드리고 헤어졌다. 산에 혼자 가는 건 안 되겠다.


산속에 있는 얼마간은 미련한 생각 없이 길 찾기에만 오롯이 집중했으니 생각 비우기엔 효과가 있긴 했다. 다음에는 옆 동네 산을 타봐야겠다. 길잃을 염려 하나도 없는 안전한 산이니까 안심하고 생각 없이 올라갔다 안전하게 내려와야겠다. 산행을 위해서 모자를 하나 주문해야지. 산에 나무 그늘이 의외로 적더라. 그리고 생각을 쉬는 방법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최소한 생각 부스터를 떼어버릴 방법이라도 찾아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