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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y 15. 2024

비오는 산에 묻은 기억


과연 천 개의 언덕의 나라다웠다. 진창에 빠져서 하나뿐인 운동화는 엉망으로  진흙을 뒤집어썼고, 다음날 어쩔 수 없이 슬리퍼를 신어야 했다. 슬리퍼를 신고 종일 산을 타는 게 괜찮을지 겁이 났지만 별 수 있나. 헥헥 거리며 산을 타고 주인공 집에 도착하면 곧바로 그 집 아들이 학교를 간다.


운동화가 오늘 다 말라야 할 텐데, 슬리퍼마저 끊어지면 어쩌나 걱정하며 미끌거리는 산길이 무서워서 발가락 끝에 바짝 힘을 주고 등굣길을 바삐 따라갔다. 나는 5분 만에 숨을 헐떡이는데 동네 아이들은 슬리퍼를 신고도ㅈ다람쥐처럼 잘도 뛰어다닌다. 현지 직원 낄낄거리며 르완다에서 그런 체력으로는 아무 데도 다닐 수 없다고 했다. '나도 잘 알지만 지금 그런 말은 도움이 안 돼요." 마침 모자도 빨간색이라 수학여행에서 우리를 괴롭히던 교관처럼 얄밉다. 해가 질 때까지 산길을 대여섯 번은 오르락내리락하고 강을 건넜다. 하필 마을이 다 산에 있을 게 뭐람.


그래도 출퇴근하는 산길은 다정한 드라이버 덕분에 즐거웠다. 그는 출장지에서 만난 분들 중 손에 꼽히게 신사적이었다. 다양한 수종과 스쳐가는 동물의 이름을 알려주고 산길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잠시 차를 세우고 조심히 앞뒤를 살피며 다녀야 한다고 진지하게 타일렀다. 일정 마지막 날 우리가 만났던 아홉 살 여자아이의 선물을 고를 때는 마을 사람들이 어떤 재질을 좋아하는지, 천이 튼튼한지 비침은 어느 정도인지 햇빛에 비춰보며 꼼꼼히 골라주었다. 유난스럽지 않게 다정향기처럼 피어나는 사람이었다.


그 산에서 특별한 일도 있었다. 산골 마을은 필연적으로 해가 일찍 숨는다. 그날은 일정이 늦어진 탓에 해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퇴근하고 있었는데 산 중간쯤에서 외국인 하이커 한 명을 발견했다. 어딘가 다쳤는지 페달을 밟는 것도 어색했고 어두운 산길이라 속도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해가 져버린 산길을 부상을 입은채로 내려가기란 어려울 것 같아서 우리는 차를 세우고 그에게 우리 차에 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차에 탈 정도는 아니고 자신을 가까운 병원으로 안내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우리는 그러겠노라고 앞장서서 속도를 조절하며 산 아래 병원까지 그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며 달렸다. 병원 앞에 도착해서 외국인 하이커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크게 안심한 듯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두운 산중에서 갑자기 길을 안내해 주려고 나타난 사람들. 르완다인과 동양인 무리가  무슨 단체소속이라고 하는데 어딘지 잘 모르겠고, 겨우 도착해 보니 불 꺼진 병원, 하필 병원 옆은 빈 공장. 이 모든 정황이 오해를 키웠다. 납치단에게 잘못 걸렸다고 생각한 그는 산을 내려오는 내내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차라리 도움을 거절할 걸 후회도 했다고 했다. 불 꺼진 병원 앞에서 인근 병원에 전화를 걸어 해결방법을 찾아주는 걸 보고서야 그는 우리가 선량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안도다. 진작 확실한 직원신분증과 낮에 마을에서 찍은 사진이라도 보여주며 안심시킬 걸 그랬지.


두 번째 천 개의 언덕의 나라는 르완다 옆 부룬디였다. 나의 첫 번째 아프리카 출장지이자 마지막 출장지. 우기의 부룬디를 제대로 겪었던 2월. 폭우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산중에 차를 멈추었다. 우리는 차 안에 있지만 우리 차 옆으로 가끔씩 오가는 주민들은 이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걸었다. 며칠 전 아침에 만났던, 아이들을 업고 강을 건너 학교에 데려다주던 아빠들이 생각났다. 강물이 더 불어나면 아이들이 아예 학교에 갈 수 없을 텐데. 그 강에서 매년 사고가 많은데 정부 지원이 없어 다리를 놓지도 못한다고 했다. 몇 해 전 폭우에 떠내려간 나리를 재건할 사정이 안 된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산을 통과해야 했다. 산 넘어 병원에 가려고 해가 뜨기도 전에 집을 나선 엄마와 아이. 학교에 가려고 한 시간 넘는 산길을 걷는 아이들. 이렇게 비가 오면 그 사람들 다 어쩌지 하는 걱정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빗속을 두리번거렸다. 비 때문에 물안개가 자욱한 폭포 옆을 지날 때면 신비로운 자연의 품에 안긴 듯한 경이로운 기분과 으스스함, 걱정이 한번에 몰려왔다.


오늘 이렇게 창을 흔드는 거센 비 때문에 그 산들이 생각났다. 비 맞은 르완다와 부룬디의 산. 나무와 흙냄새를 담아 한국에 가져오고 싶었지만 각종 사고가 걱정되던 산.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리워지는 아프리카의 향기는 이른 아침 비에 젖은 산이 뿜어내는 초록 향기와 흙냄새다. 촉촉한 자연의 향기를 온몸으로 흡수하듯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면 몸이 깨끗하게 씻기는 기분이었다. 그리운 향기가 겹겹이 쌓여 나를 부른다. 내 몹쓸 후각은 그때 향을 벌써 많이 지웠다. 기억 속에서 해마다 옅어 이젠 어렴풋하게만 남아있다. 유통기한이 지난 향수병에 코를 대듯 기억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면서 그때를 떠올다. 아침이슬 맺힌 산길을 걸어가며 손을 흔들어주던 아이들, 맑은 공기와 맑은 냄새. 올해 우기를 별 사고 없이 안전하게 보내기 바란다.


비 오는 밤은 이렇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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