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매주 한 권씩 예상에 없던 책을 샀다. 그건 모두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내가 얼마나 시간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아도 그 모두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그들 중 몇몇은 첫 만남부터 단 한 번도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 맙소사.
그렇게 약속 시간을 어긴 사람들 때문에 사게 된 첫 번째 책은 <실패에 관하여>다. 표지 때문에 고르진 않았지만 그날 기분에 딱 맞게 표지가 보라색이었다. 일행이 얼마나 늦을지 알 수 없어 장소 근처를 검색해서 들어간 독립 서점은 문을 열자 하얀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었다. 짧은 환영 인사를 마친 후 제자리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아이의 이름은 순돌이였다. 강원도에서 구조되어 책방 주인을 만난 지 십 년이 넘었다고 했다.
책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 <실패에 관하여>를 결제하자마자 주인이 순돌이 포토카드를 탁 하고 책 위에 올려주었다. 책을 사면 강아지 포토 카드를 주는 서점이라니. 훌륭한 마케팅이다. 뒤늦게 도착한 일행은 그 포토카드를 받기 위해 무려 3만 원짜리 디자인 책을 고민도 없이 샀다. 그날의 기분엔 바로 정독을 시작할 줄 알았는데, 다른 책에 밀려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상태다.
두 번째 우연히 산 책은 칠레 작가 뱅하민 라바투트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멈출 때>인데 책을 산 서점 이름은 연남동 <어쩌다 책방>이다. 그날도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 30분 늦겠다는 연락을 받아 가까운 서점을 검색해 찾아갔다. 정말 어쩌다 들어가게 된 서점은 유명세가 있는 곳인지 작은 공간에 비해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내가 십여분 책을 둘러보는 사이 손님들이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중 누구도 책을 사지 않고 책방을 떠났다. 서점에서도 사진만 찍고 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뱅하민 작가의 책은 <매니악>이 더 유명한 듯 하지만 그 서점엔 매니악이 없었고 제목도 과학 논픽션 소설치고 서정적인 점도 마음에 들어 골랐다. 아쉽게 이 책도 다른 책에 밀려 아직 완독 하지 못했다.
세 번째 책은 진부 책방에서 산 <이 중 하나는 거짓말>이다. 갑작스레 점심시간을 혼자 보내게 된 하루, 진작부터 가보고 싶던 진부책방이 마침 사무실 근처라 속으로 야호를 부르며 냅다 달려갔다. 그날은 내가 책방의 첫 손님이었다. 생각보다 아담한 서점은 둘러보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고 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에 보이는 김애란 작가님의 작품을 그날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단편을 모두 사랑하지만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더 사랑하게 된다. 이 작품은 13년 만의 장편 소설인데 첫 장에 작가님의 친필 사인(인 줄 알았지만 인쇄본일 지도 모를, 그러나 어쨌든 한정판인.)이 있었기에 ‘어머 이건 사야 돼’ 심정이 되지 않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인 문구부터 심상치 않았다.
어떤 거짓은 용서해 주고 어떤 진실은 조용히 승인해 주는 작은 기적처럼.
이 책은 올해 최고의 책 안에 들만큼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김애란 작가의 시선과 문장이 더 깊고 넓어진 채로 이야기를 펼쳐내는 작품이었다. 책의 제목은 고등학교 어느 반에서 새 학기 자기소개를 하는 방식에서 따왔다.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은 다섯 문장으로 자기를 소개한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거짓말이다. 세 아이는 각자의 거짓말을 가지고 있는데 그 거짓말이 교차하는 방식, 나를 묶어놓던 거짓말에서 아이들이 해방되는 방식도 모두 좋았다. 작가의 사인 문구처럼 책 사이에 껴 있던 엽서에 적인 작가의 말도 좋았다.
나이 들어 더 느끼는 바지만 시간은 가차 없고 시간은 무자비하지요. 하지만 가끔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에 어떤 선이 생겨, 이런 이야기를 선물해 주는 게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그 ‘선’ 때문에 저 또한 사람을 대하는 마음과 눈이 더 깊어졌고요. 그 사이 여러분은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어떤 이야기에 다치고, 어떤 거짓말에 기대고, 또 어떤 말 때문에 웃으셨을까요? 그 시절을 제가 감히 다 짐작할 순 없지만, 지금도 또 앞으로도 여러분이 가능한 한 좋은 이야기 속에 머무셨으면 좋겠습니다.
책으로도 충분히 위로받았지만 책 안의 이야기를 열고 닫고 덮어주는 작가의 말이 그 모두를 완벽하게 연결해 주었다. 다 읽고 난 후 이건 이제껏 내가 읽었던 작가님 작품 중 최애가 되었다. 물론 이전까지는 직전 작품이 최애였으니 차기작이 나오면 최애가 바뀔 가능성이 많다. 그래도 당분간은. 흐름상 이 책 다음으로는 <실패에 관하여>를 읽어야겠고 그 후에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멈출 때>를 읽어야겠다.
오랜만에 버섯머리를 만났고 언제나 격려하는 말을 일상어처럼 해주는 그녀는 오늘도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게 연결될 거야. 지금까지 그랬잖아. 하나씩 다 연결돼서 결국 너는 잘 될 거야.”
어디선가 다친 마음이 여기에서 위로받았다. 그녀의 진심이 현실에서 거짓말이 되더라도 잠시동안 그 말에 기대고 싶었다. 그 말 때문에 웃었으니까.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에 선들이 연결되어 앞으로 내가 가능한 한 좋은 이야기 속에 머물기를 기대하게 하는 말이었다.
내일은 연휴를 맞이해 우연히 말고, 작정하고 책을 사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