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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Dec 11. 2015

19 타파스 한 접시에 확신은 흔들리고

스페인 안달루시아(세비야/론다/그라나다)

19

타파스 한 접시에 확신은 흔들리고

스페인 안달루시아(세비야/론다/그라나다)


세비야, 론다, 그라나다의 공통점은? 바로 ‘안달루시아(Andalucia)’에 속한다는 점이다. 스페인 남쪽 끝에 자리 잡은 안달루시아는 스페인에서 가장 큰 지역 중 하나다. 서쪽으로는 포르투갈, 남쪽으로는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데 그 면적이 약 8만 7600㎢에 달한다.


안달루시아 하면 해변과 태양이 유명하다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방문했던 세비야, 론다, 그라나다는 해안 도시가 아니었다. 게다가 태양을 만끽하지도 못했다. 세 도시를 지나는 동안 구름이 하늘을 덮어 태양을 가리기 일쑤였기 때문. 심지어 세비야에선 폭우를 뚫으며 여행하느라 심한 고생을 했다. 스페인도 이탈리아처럼 겨울이 우기(雨期)다. 나의 안달루시아 여행은 12월 12일부터 17일까지였다. 별 수 없이 흐린 날씨의 내륙 도시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세비야 길거리의 오렌지 나무. 오렌지의 색은 하나같이 밝고 선명해 흐린 날씨를 무색케 했다. 마치 평소 이곳을 비추고 달군다는 태양의 존재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히랄다 탑에서 바라본 세비야 대성당과 오렌지 정원의 모습


론다의 누에보 다리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내의 나스리드 궁전. 이처럼 안달루시아엔 이슬람 양식의 건물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선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


‘신 이외의 정복자는 없다’는 문장으로 수놓인 나스리드 궁전 내부 벽의 모습. 이슬람교에서는 사람 혹은 동물을 벽에 그리거나 새기는 행위를 일종의 ‘우상숭배’로 간주한다고 한다. 이슬람 건물 벽이 식물이나 별, 꽃, 기하학적인 무늬, 혹은 이러한 문자로 장식돼 있는 이유다. 이런 이슬람의 장식 무늬를 일컬어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한다. ‘아라비아풍(風)’이란 의미다.


나스리드 궁전 내 대사의 방. 아라베스크의 극치다.




안달루시아는 동양과 서양, 가톨릭과 이슬람이 서로 부딪치고 공존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 때문인지 건축과 음식 등이 유럽의 여타 지역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해변도 태양도 없었던 안달루시아 여행 동안 이런 점은 충분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기억에 더 강하게 남은 건 따로 있다. 바로 타파스(tapas)로 기억되는 이곳 사람들의 흥겨움과 낙천성이다. 타파스란 작은 접시에 담겨져 나오는 소량의 요리를 뜻하는데, ‘덮개’ 혹은 ‘뚜껑’이란 뜻의 스페인어 ‘타파(tapa)’가 그 어원이라고 한다. 안달루시아 사람들이 술이 담긴 잔 위에 먼지나 날벌레 등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빵이나 고기를 올려두었던 데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다.


스페인에서 처음 찾은 타파스 바는 세비야의 ‘보데가 산타 크루즈(Bodega Santa Cruz)’였다. 오후 8시쯤 이곳을 방문했다. 일찍 찾아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가게 안팎은 이미 엄청난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겨우 비집고 들어가 바텐더와 마주했다. 바텐더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뒤섞어 쓰며 주문을 재촉했다. 재촉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재촉하는 게, 낯선 분위기에 당황한 이방인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했다. 주문을 마치니 바텐더는 귓등에 꽂아두었던 분필을 꺼내어 바에 요금을 휘갈겨 적었다. 그리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를 향해 사람 좋게 씩 웃었다.


술과 타파스를 받아들고 나니 이걸 어디서 먹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이미 가게 안의 테이블은 꽉 차 있었다. 입석 테이블이 놓인 가게 밖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곳 사람들은 테이블이 없으면 없는 대로 가게 밖에 선 채 술과 타파스를 즐겼다. 아니… 도대체 이 사람들은 뭐지…? 별 수 없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먹고 있는데 갑자기 유모차를 끈 한 부부가 등장한다. 아니… 술집에 아기가…? 부모의 손을 잡은 어린 소년·소녀가 수시로 출몰하는 것도 예사였다. 약간 당황스러운 풍경에 넋을 놓고 있자니 이번엔 웬 청년들이 줄지어 나타나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누군가 노래를 따라했고, 노래가 끝나자 박수가 터졌으며, 이어 경쾌한 동전소리가 ‘짤랑’ 하고 밤공기를 갈랐다.


타파스 바가 이 모양인 건 세비야뿐만이 아니었다. 론다나 그라나다의 타파스 바도 사정은 마찬가지. 초저녁부터 붐볐고, 정신없는 가운데서도 신속한 주문과 수령이 이어졌으며, 앉을 자리가 없어도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술과 타파스를 즐겼다. 론다의 한 타파스 바에선 내게 “마이 프렌드!”란 말을 100번쯤 건넨 종업원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라나다에선 작은 사이즈의 맥주를 달랬더니 엄청나게 큰 사이즈의 맥주를 건네주곤 엄지를 척 들어보이던 종업원 때문에 얼이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환히 웃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나곤 했다.




세비야의 타파스 바 ‘보데가 산타 크루즈’ 밖에 선 채 술과 타파스를 즐기는 사람들. 청년들의 노래가 흥겨움을 더한다.


세비야 밤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청년들. 해가 진 세비야 거리 곳곳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음악으로 밤을 물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그 안에 들어가면 고단한 삶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다. 타파스 바에 들를 때마다 나는 헷갈렸다. 스페인의 실업률과 경제성장률 등을 고려할 때, 이 사람들이 진심으로 흥겹고 낙천적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흥겹고 낙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내가 이방인의 시각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달루시아 이전에 들렀던 도시 마드리드와 이후 들렀던 도시 바르셀로나의 사람들을 보며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안달루시아 사람들은 같은 나라 사람들인 마드리드·바르셀로나 사람들과 비교해도 확실히 더 흥겹고 낙천적이었다. 이 말은 곧 더 비생산적이고 게으르다는 말이기도 하다. 낮엔 길거리 가게 상당수가 시에스타(siesta)를 지키겠다며 문을 걸어 닫으면서도, 밤이 되면 날 새는 줄 모르고 술과 타파스를 즐기는 곳… 해가 진 거리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여 노래를 불러대고, 수많은 사람들이 할 일도 없는지 그걸 지켜보며 박수치며 좋아하는 곳… 내가 목격한 안달루시아는 그런 곳이었다.


유럽여행을 오기 전, 직장에 다니던 나는 스페인 사람들이 정부의 여러 가지 긴축재정 안에 반대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혀를 끌끌 차곤 했다. 나라가 경제위기에 봉착했다는데 본인의 안위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그런데 직접 와서 이들의 삶을 지켜보고 나니 혀를 끌끌 차던 과거의 내 모습이 약간 안쓰러워졌다. 한국인의 삶은 안달루시아 사람들이 볼 때 어떤 모습일까. 또 유럽여행을 오기 전 내 삶을 안달루시아 사람들이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혀를 끌끌 차던 과거의 나는 분명 확신에 차 있었던 것 같은데…. 술과 타파스를 즐기던 안달루시아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약간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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