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건물에서 뛰어내린 남자가 핸드폰 울리는 소릴 듣고 후회했다면
* (글감에 추가되어 있는 조건) 한 남자가 40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28층을 지날 무렵 핸드폰 벨소리를 듣고 뛰어내린 것을 후회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100미터라는 단위가 머릿속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난 이제서야 깨달았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했을 때 나는 운동장 건너에서 주자들을 기다리던 결승 깃발이 까마득히 먼 곳에 있다고 느꼈다. 다리를 힘껏 놀려 트랙을 가로지르는 그 일이 나는 볼썽사납다고 생각했다. 들이는 노력이 만만치 않음에도 승자가 얻는 영광은 대부분 찰나에 그쳤고 그래서 하찮았다. 아니, 그렇게 여겼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고, 뜀박질이 시작되고, 옆에서 뛰던 같은 반 녀석이 점점 작아져 가는 모습을 그의 등 뒤에서 나는 언제나 헐떡이며 바라보았다. 나의 다리도 움직이고 또 움직였지만 결승점은 도무지 가까워질 줄을 몰랐다. 결승 깃발은 그 친구를 위해 힘차게 흔들렸고 나를 위한 깃발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100미터 달리기는 언제나 그렇게 끝났고 100미터라는 거리는 나의 머릿속에서 그렇게 한없이 먼 것이 되어 있었다.
지금 나는 100미터라는 거리를 다시 움직이고 있다. 처음 발을 떼었을 때 나는 종착지까지의 이 100미터를 어떻게 좁히게 될 것인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전 100미터 달리기와 다르게, 지금은 도착지점이 나를 끊임없이 그쪽으로 잡아당겨 주었다. 나를 앞서 재우쳐나가는 경쟁자도 없었다. 100미터라는 공간의 이격은 이제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제 온몸으로 100미터의 짧음을 느끼고 있었다. 바람이 귓전을 가르고 지나는 소리가 들렸고, 10미터, 20미터 지점을 지나면서 눈 앞의 정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다가오는 종착점이 점점 시야를 가득 채워오는 것을 느꼈다.
그 때였다.
"삑! 삑!... ..."
주머니에서 괴성에 가까운 알림이 들렸다. 그였다.
* 글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은 글감이었다. 대부분 건물에서 뛰어내리면 자살이라는 소재를 연상하게 되므로 그것을 피하고 싶어 이리저리 생각을 돌려보았지만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뻔한 소재지만 도입부를 흡입력있게 써보는 연습을 하기로 하고 썼다. 40층 건물이면 대략 100미터 초반대일 거 같은데, 100미터라고 하니 100미터 달리기가 떠올랐다. 문득 그것을 달릴 때와 떨어질 때의 감각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패배하여 높이 100미터의 건물을 뛰어내리게 된 남자'가 '100미터 달리기에서 패배하던 때의 기억'이라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써보았다. 그러나 역시 쉽지 않았다. 이 글감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