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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르니스트 Feb 15. 2024

매일 30분, 글쓰기 좋은 질문 642

(27) 한 사람을 선택하고 그가 내려야 했던 가장 힘든 결정을 써보라

    서윤은 깜빡이는 커서를 한참동안 바라 보았다. 몇 개의 글씨를 만들었다가 다시 지우기를 반복했다. 커서는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오고 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여러가지를 생각했다. 그와 처음 나눴던 채팅창에서의 인사가 먼저 떠올랐다. 그 다음에는, 부지불식간에 그와의 통화 버튼을 눌렀을 때 서성거렸던 저녁 무렵 집 앞의 단골 커피숍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 때 코끝을 맴돌던 커피향과, 손 끝에 닿던 핸드폰 화면의 질감이 서윤의 머릿속에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녀의 기억은, 그녀 스스로도 윤색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그 날 저녁, 차가운 바깥 공기에 식어버린 핸드폰의 유리 화면은 서늘하고 건조했는데, 커피 컵에 덥혀진 서윤의 손가락이 닿자 화면이 순식간에 환해지며 그에게 전화가 걸렸던 것 같은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서윤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분명히 느꼈다. 그럼에도 그를 끊어내려는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과거에 서린 슬픔이 여전히 마음 깊숙이에서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그 순간 분명히 탈출구이자, 진통제였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깔깔거리고, 만나서 처음으로, 딱 한 번 손을 맞잡았을 때 그것을 확연히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남편과, 남편이 그녀에게 가져온 모든 상처들을 완벽히 잊을 수 있었다. 즐거웠다. 웃을 수 있었고 마음 속에서 사라졌던 예전의 어떤 온기가 되살아났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집 앞에 바래다 준 그의 차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음 속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그는 건너편이 어슴푸레 비쳐보이는, 어떤 반투명한 비닐이나 유리와 비슷한 존재라고.

    그녀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그 또한 채팅창에 메시지를 넣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항상 그래왔다. 자신의 태도에 예민하게, 또 세심하게 반응해 주는 사람이었다. 서윤이 잠잠할 때 그는 억지로 농짓거리를 하거나 하는 경박함이 없었다. 그 사려깊음과 진중함이 앞으로 한참 동안 그리울 것이 분명했다 - 남편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리움이라는 것으로 그를 자신에게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은 그 만큼의 깊이로 내려앉을 수 없음을 알고 또 되새겼다.

    서윤은 입을 다문 채 손가락을 천천히 놀렸다. 한 글자, 한 글자씩 커서를 밀어내며 글씨를 만들어 나갔다.




*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한 여자가, 배신감으로 다른 남자를 온라인에서 찾게 되었으나 자신의 위치로 돌아올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 이야기. 새로운 만남을 지워야 하는 아쉬움보다는, 마음 속의 큰 상처를 어떻게도 지울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 결정의 슬픔을 써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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