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쓸모(최태성)
'역사에서까지 쓸모를 찾아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뒤 진중문고 목록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수학의 쓸모>, <기록의 쓸모> 등 '쓸모'가 제목을 구성하는 책이 몇 권 있었다. 물론 우리는 실용성과 효율성으로 점철된 사회를 살아가고, '모든 것에서 쓸모를 찾아야 하는가' 생각하는 나조차도 삶에서 많은 순간 실용성과 효율성만을 좇지만, 왠지 모르게 역사와 쓸모를 결합하는 것에서 생리적인 거부반응이 마구 들었다. 역사는 그냥 역사로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나에게 어떤 '쓸모'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과거의 일들을 알아가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이 사주신 세계사, 한국사 책을 통해 과거의 사건과 갈등을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누렸다. 이 책을 집어 들기 전에는 역사의 실용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역사의 '쓸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사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는 기록을 통해서 전수된 것이다. 식자층은 극소수였고, 글을 쓰는 작업이 어마어마한 비용을 요구하는 일이었기에 글을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언가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리다.
책을 읽다가 언뜻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믿음이 떠올랐다. '많은 지식은 반드시 좋은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때문에 인간은 공부한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좋은 삶을 위해서이다. 역사에 대입해보자면,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책임 있는 역사의식을 갖기 위해서이다. 책임 있는 역사의식은 우리의 삶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여기서 책임을 진다는 말은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하나의 잣대만으로 현상을 평가하지 않으며, '오늘의 나' 역시 거대한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자각하며 겸손한 태도로 사는 것이다.
사회는 언제나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과거이든 현재이든, 동양이든 서양이든 사람들은 늘 자기의 목소리를 내어 왔다. 그리고 역사라는 교과서는 이 다양한 목소리의 토론을 주최하는 각축장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람들이 당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그들이 반응하고 해석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하나의 텍스트로 본다면, 우리는 단지 기록된 글자로써 텍스트(text)만이 아니라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는 텍스트(beyond text)를 읽어낼 수 있다. 나아가 이 모든 단계의 텍스트를 읽는 독자가 개입할 때 비로소 텍스트에서 의미가 생성된다. 바꾸어 말하면, 의미는 과거의 텍스트(text)를 오늘날의 컨텍스트(context)로 풀어낼 때 생겨난다. 과거의 사건에 대해 우리가 반응하고 해석할 때 의미가 새긴다. 즉, 의미 생성은 해석의 문제이다.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이다.
이렇게 책을 읽으며 과거의 텍스트를 오늘날의 컨텍스트에 적용하고, 나에게 의미가 양산되는 지점 세 가지를 발견하였다. 이제부터는 책을 읽고 역사가 실제로 나에게 어떤 '쓸모'가 있을지 생각하고 정리한 내용이다. 요컨대, 책을 읽고 내가 발견한 '역사의 쓸모'라 하겠다.
첫째로,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루에도 수백 번의 선택을 하며 크고 작은 선택의 문제 앞에서 고민한다. 역사 속 인물들도 당연히 치열하게 고민하였다. 일본 선봉장 가토를 쫓아야 하는지 고민했던 이순신,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한 이회영, 한 번뿐인 인생을 백성들의 형편을 구제하기 위해 힘쓴 대동법의 아버지 김육 모두 처절한 고민 끝에 자신의 결정을 내렸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중대사를 앞에 두고 무언가 선택한 이들을 만날 수가 있다. 누군가는 좋은 선택으로 우리에게 귀감이 되어주지만, 누군가는 수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동안 쌓아 온 것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책임 있는 역사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품위 있는 선택을 하도록 만든다. 작게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결단을 내릴 수 있으며, 크게는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위대한 선택을 하도록 만든다. 자신이 역사에 남을만한 위대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품위 있는 선택은 중요하다. '나'라는 개인 역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구성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선택은 중요하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이냐에 따라 인생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 속 인물들은 '삶이 뭐 다 그렇지' 생각하는 삶보다 '삶은 이런 거지' 생각하고 이를 살아내었던 이들이다. 귀중한 목표를 세우고 찾아가는 데에 중요한 선택의 결단을 역사에서 배울 수 있다.
둘째로, 나와 다른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대사회는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왔다. 그러나 결코 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계층, 성별, 인종, 종교 등 다양한 부문에서 양극화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발전을 향한 밑거름이 되기에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갈등은 자신이 생각해보지 못한 것에서 충돌을 일으킨 사건이며, 대화와 토론을 통한 해결은 서로에게 발전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 사회에서 남한과 북한만큼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것이 또 있을까? 가깝지만 먼 두 나라는 반세기 이상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갈등을 빚어 왔다. 남한은 늘 북한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1994년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을 때 북한 사람들은 대성통곡을 했다. 누군가는 저 상황에서 울지 않으면 잡혀가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울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과연 모든 사람이 똑같은 심정으로 울었을지는 나에게 의문이었다. 저자도 이를 지적하며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는 그들이 김일성의 죽음을 슬퍼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경험의 공유'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내가 살아온 시대의 지도자 김일성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와 함께 그 시대를 견뎌온 나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142)
이와 비슷한 상황을 한국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서로 다른 집단이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견의 대립은 늘 충돌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이해관계는 언제나 대립되는 것으로만 보이지만, 그 현상의 본질을 파악할 때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의 두 협상가, 서희와 원종의 경우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서희와 원종은 각각 해답이 보이지 않는 무척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고려와 거란, 고려와 몽골 간의 외교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들이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상대에 대한 이해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나와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을 이해하는 역사의식을 지닌다면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갈등과 반목을 넘어서는 단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로, 창조적인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있듯이, 과거에 대한 이해는 창조를 향한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창조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용도와 기능에 맞도록 이전의 것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다. 저자는 위대한 창조의 예시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든다. 구텐베르크는 당시에 이미 존재하던 금속활자, 프레스기, 종이를 응용하고 새롭게 조합하여 인쇄기를 창조하였다. 이로 인해 대량 인쇄가 가능해졌고, 이후 종교개혁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위대한 창조의 예시로 한글을 빼놓을 수 없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글자가 없어 자기 뜻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새로 글자를 만들었다고 <훈민정음 언해본>에서 밝힌다. 이전까지는 지배층만이 글자를 독점했지만, 훈민정음 반포 이후에는 백성들이 글을 익혀, 서로 편지를 쓰고 정승을 비판하는 글을 벽에 붙이기도 하며 지식과 정보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한글은 백성들의 언어가 되어 자유롭게 생각과 감정을 표현,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위대한 창조물이 되는 경우는 창작물을 혼자서만 감상할 때가 아니다. 소수를 위한 기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며, 다수를 대변하고 삶을 윤택하게 만들 때만 위대한 창조라 이름 붙인다. 이렇게 본다면 한글 창제야말로 위대한 창조가 아닐 수 없다.
역사가 정말로 쓸모가 있으려면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을 '앎'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앎이 '삶'으로 드러날 때 역사는 비로소 제 몫을 했다고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미래와 연결된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며, 현재와 연결된 과거를 잘 알고 있다. 과거에 대한 지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내일의 지침이 되어주기에 역사가 알려준 것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