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리여리 Jun 09. 2022

“모리스 블랑쇼의 중성과 글쓰기, 역동적 파노라마”

김성하.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119-45.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는 사상가인 동시에 작가였다. 그의 글을 읽는 이들은 그를 ‘어렵다’고 평가한다. 그의 문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의 문체가 어렵기에 난해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글과 사유는 물음에 물음을 잇는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블랑쇼는 철학, 문학,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글을 남겼다. 


블랑쇼의 삶과 철학적 사유

  그는 평생 투병 생활을 하였다. 블랑쇼는 고질적 천식, 만성 유행성 감기, 늑막염, 결핵, 어지럼증, 호흡곤란 등으로 고생하였으며, 큰 키에 마른 체격과 창백한 얼굴로 죽음에 노출된 삶을 살았다. 이런 그의 삶을 바탕으로 그의 글을 읽는다면, 블랑쇼는 자신의 경험을 느끼고 생각한 그대로 글을 썼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삶은 병으로 피곤하였기에 그의 글에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인상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글은 희망도 절망도 아닌 어떤 역동성이 있다. 블랑쇼는 삶과 죽음, 죽음과 사유, 사유와 삶을 통해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적 주제를 제시하였다. 그는 ‘중성’(le neutre)을 통해 역설과 모순 속에서 샘솟는 역동성을 제시한다. 이는 애매모호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소극적인 것을 뛰어넘는 역동으로 보아야 한다.


무한의 관계

  블랑쇼는 ‘사유하다’(penser)와 ‘철학하다’(philosopher)를 구분하지만, 사유의 주제를 개념화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개념화는 폐쇄와 정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한다 혹은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1  반면에 철학은 “복잡하고 학문적인 단어나, 특별한 지식으로 형성된 개념”을 사용하는 언어행위이다.2  또한 전통적인 철학은 교육과 연관된다. 그는 고대부터 스승과 제자라는 원초적 구조에서 철학과 교육 사이의 연결고리를 제시한다. 블랑쇼는 ‘가르치다’(enseigner)라는 말은 ‘말을 하다’(parler)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상호관계이다. 사유를 통한 스승의 말하기는 안정된 구조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불균형과 불일치로 이끌어 ‘무한의 관계’(rapport d’infinité)로 들어가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일방적 구조에서는 철학자인 스승이 제자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면서 명확한 정답을 도출하게 한다. 반면에 무한의 관계에서 스승과 제자는 서로 말과 사유를 통해 “미지, 즉 알 수 없음 혹은 알려지지 않은 것”(무한)으로 빠져들고 다시 여기에서 무언가를 알게 된다고 한다.3  블랑쇼는 ‘철학하다’와 ‘사유하다’를 구별하면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칭적, 직선적, 안정적 관계를 끊어버리고 우리를 무한의 차이와 긴장인 비대칭, 곡선적, 불균형 관계로 초대한다. 그리고 이 무한의 관계에서 역동적인 중성의 운동, 즉 알면서 모르고 모르면서 아는, 낯설지만 익숙하고 익숙하지만 낯선 역동적인 중성의 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블랑쇼를 철학자로 보기에는 다소 왜곡된 감이 있다. 정답이 없는 물음의 연속, 무한한 시작인 결과를 통해 무한한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 블랑쇼를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다.


레비나스, 바타유 그리고 블랑쇼

  블랑쇼는 1923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과 독일어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레비나스를 만난다. 블랑쇼에게 레비나스와의 만남은 독일 현상학과의 만남을 의미한다. 이 만남으로 블랑쇼는 헤겔, 후설, 하이데거 등을 통하여 ‘중성’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가 ‘존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하이데거의 영향이 컸다는 것은 레비나스도 밝힌 대목이다.4  블랑쇼에게 영향을 미친 다른 사람은 바타유이다. 그는 1940년 말 바타유를 만나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블랑쇼가 집 밖을 거의 나오지 않고 글만 쓴 반면, 바타유는 사창가를 떠돌과 술과 러시안룰렛을 즐겼다. 성격의 차이는 있지만 둘은 죽음, 신, 자아, 공동체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하여 사상적 교류를 하였다. 블랑쇼는 이런 사상적 교류를 통해 인간이 삶에서 마주하는 주제를 분석과 관찰을 통해 보지 않았다. 그는 ‘의식’과 ‘반성’에 의해 추상화되는 ‘철학’과 ‘개념’을 거부하였다.


살아 있는 사유

  블랑쇼에게 중요한 것은 삶에서 마주하는 살아 있는 ‘사유’의 경험이었다. 그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로 대변되는 의식 혹은 반성의 철학적 명제를 구별하였다. 그에게 사유는 불변의 해답, 혹은 대답할 수 없음이 아니다. 사유란 질문을 통한 또다른 질문의 가능성으로, 끝으로써 답이 아닌, 시작으로써 답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심연 속에서 확실한 것도 없이 사라지는 불확실의 세계에서 블랑쇼는 ‘밤’(la nuit)을 제시한다. 여기서 블랑쇼가 제시하는 밤은 이분법적 대립관계의 밤도 아니고, 헤겔의 변증법적 관점의 밤도 아니다. 블랑쇼는 헤겔의 직선적이고 발전적인 시간 개념을 거부하고 시간의 흐름을 단절한다. 밤은 단순히 낮에 대한 부정도 아니고, 더 밝은 내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단절은 ‘망각’(l’oubli)에 의해 설명된다. 망각은 과거와 단절되지만 과거를 지우거나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망각은 과거와 현재를 단절시킴으로 현재에 살아 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중성’이다. 그는 “망각은 잊어버림 속에서도 잊어버려지지 않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고 설명한다.5  밤은 낮을 망각했기에 밤이 된다. 밤은 낮의 밝음이 사라진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또한 낮을 망각했다고 낮이 사라지거나 없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밤과 낮은 단절된다. 그리고 낮에 대한 기억도 망각하여 도래할 낮에 대한 ‘기대’(l’attente)도 없다. 나아가 블랑쇼는 낮을 망각한 밤은 망각한 낮을 이미 품고 있다고 보았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사라진 것은 다시 드러난다. 낮이 사라졌을 때, 낮은 다시 밤에 드러난다. 이렇게 밤과 낮은 완전한 대립관계도, 완전한 단절도 아니라는 점에서 무한의 관계에 놓인 역동적 중성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종합적 타협(정반합)을 넘어 블랑쇼는 역동적인 관계로 삶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이를 삶에 적용해본다면, 관계에 있어 서로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한 단절도 아닌 무한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중성이 보여주는 종합적인 역동의 관계에서 현재 속에 그 자체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와 글쓰기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작가, 글쓰기, 작가와 독자의 관계 등에 대해 사유한다. 그는 먼저 헤겔에 반대하며 글쓰기에 대해 사유한다. 여기서는 먼저 헤겔의 이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헤겔은 행위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행위를 지녀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행위를 이미 잘 준비된 계획에 맞추어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헤겔에게 작가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이상주의적 몽상가이다. 또한 작품은 작가의 의식이 뚜렷이 투영된 것이며 이런 현존이 작품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나 블랑쇼는 작가가 작품 이전에 재능을 지니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작품에 의해서 작가가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의 재능은 작품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블랑쇼는 작가 내면에 이미 완성된 작품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 내면의 무언가가 작품으로 실현되는 것이 글쓰기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무(rien)의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이 작가의 글쓰기라는 것이다. 이는 철저히 가능성의 영역에서 사유하는, 낯설지만 익숙하고 익숙하지만 낯선 역동적인 무한의 세계로의 초대이다. 이렇게 예측 불가한 역동이 바로 블랑쇼의 글쓰기이다.

  블랑쇼가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보여주려고 한 것은 의식에 갇혀 있는 주체(Le sujet)의 해방이다. 확신에 찬 ‘나’는 존재의 확신에 물음을 던지며 불안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불확실한 상태는 ‘무’로 표현되며 이 ‘무’의 상태에서 벗어나 ‘무아’(le neant)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결과이다.



1 Maurice Blanchot, L’entretien infini (Paris: Gallimard, 1969), 1.

2 Ibid., 1.

3 Ibid., 5.

4 Emmanuel Lévinas, Sur Maurice Blanchot (Montpellier: Fata Morgana, 1995).

5 Maurice Blanchot, L’attente l’oubli (Paris: Gallimard), 78.

작가의 이전글 “엠마뉘엘 레비나스, 향유에서 욕망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