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우리아이 미술치료사-뇌발달
엄마는 아이를 낳으면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다. 이렇게 작은 몸체가 나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 경외롭기까지하다. 아이를 잘 키워내고자하는 것은 엄마의 강한 본능이며, 이 때부터 아이에게 좋다는 정보는 여전사 소머즈의 귀를 가진 것 처럼 잘 들린다. 하지만 아는게 병이라는 말도 있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는 엄마를 더욱 혼란스럽게하고, 불안에 빠진 엄마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 기준도 없이 불안하지 않은 선택을 한다.
'아, 하나 시켰구나! '
'해줬으니까 되겠지?'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것을 남이 해줄 수 있다는 위탁교육 시스템이 과연 옳을까 고민해본다.
한 6세 아이가 영어학원에 지쳐 안가겠다는 것을 엄마는 놀이식이라 괜찮다며 억지로 보내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나는 영어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둘 수 있는 영어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말도 못했다. 나도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한쪽에는 숫자로, 다른한쪽에는 영어로. 예를 들어 '1'하면 'one' 하는 식으로 이중언어를 가르쳐볼 욕심에 엄마표 카드를 만들어 열심히 읽어줬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아이보다 내 즐거움이 더 컸고 아이는 엄마가 열심히 놀아주는 기쁨이 더 컸으리라 생각한다. 그 때의 내 노력은 어디 갔는지 아이는 이중언어자가 되지 않았다.
인간은 언어를 모른 채 태어난다. 세상에 막 나왔을 때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몇 달만 지나면 말귀를 알아듣고 1년 정도 더 지나면 말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 일단 말을 시작하면 몇 년 걸리지 않아 길고 복잡한 문장을 구사하며 그리 오래지 않아 문자를 익히고 글을 익는다.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을 해내는 것일까? 아직은 완전하게 않았다. 하지만 뇌과학자들은 언어 습득의 비밀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사실을 여럿 밝혀냈다.
인간의 모든 지적・정신적・신체적 활동을 총괄하는 신체기관은 뇌다. 3층구조로 된 이 1.4킬로그램짜리 살덩어리는 수십억년에 걸친 생물의 진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언어 구사를 포함한 정신적・지적 활동은 대뇌피질이 관장한다. 말하기,글쓰기,생각하기.그림그리기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뇌에는 약 1000억개의 신경세포(뉴런)가 있다. 뇌신경세포는 저마다 수 십개에서 수천 개의 돌기(시냅스)를 만들어 다른 신경세포와 전기적・화학적 신호를 교환한다. 뇌는 여러 신체기관이 전해준 정보를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분석 처리하며 각각의 신체기관이 상황에 맞는 운동을 하도록 명령한다. 우리가 자아를 인식하고 의식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뇌가 있기 때문이다.
‘자아’나 ‘지성’ ‘의식’은 물질이 아니라 뇌신경세포가 주고받는 전기적・화학적 신호의 집합일 뿐이다. 언어구사는 뇌가 수행하는 여러 기능 중 하나이다. 대뇌피질은 영역마다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한다. 언어를 관장하는 영역도 물론 따로 있다. 이 영역은 뇌가 성장하는 동안 다른 일을 하는 영역과 함께 형성된다. 뇌는 태내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해 태어난 후 3년 정도 폭발적으로 자라며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성장기의 뇌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부위에서 더 많은 신경세포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벌어진다. 그래서 이 시기에 어떤 환경에 노출되어 어떤 자극과 과제를 받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점토와 비슷하다는 것이 뇌가소성원리이다.
뇌는 유전자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다. 환경도 뇌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우리의 뇌는 생물학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뇌는 평생 두 요인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 발전, 퇴화한다. 사람의 언어구사능력도 유전자와 환경이 어울려 성장한다. 사람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데 필요한 생물학적 하드웨어를 지니고 태어나며, 부모를 비롯한 주변사람들과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모국어라는 소프트웨어를 창작한다. 부모는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풍부한 언어적 자극을 제공함으로써 아이의 뇌가 이 과제를 순조롭게 완수하도록 도울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둘 이상의 언어를 마치 하나의 언어처럼 구사한다. 이중언어 즉, 바이링궐이라고한다. 이러한 다중언어(多重言語) 능력을 선망한 나머지 어린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조기교육에 열을 올리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 이유는 특별히 그에 적합한 유전자를 가진 아이가 부모와 전문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복수의 언어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경우에만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유치원에 보낸다고 무조건 바이링궐, 다중언어 능력자가 되는게 아니다. 오히려 원치 않는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문명이 생긴 이후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진화했다는 증거는 없다. 우리의 몸, 우리의 뇌, 우리의 유전자는 문명이 생기기 이전인 수렵・채집 시대에 만들어졌다. 수십만 년 동안 인간은 몇십명이 넘지 않는 혈연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둘 이상의 언어에 노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것은 우리의 뇌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최적화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뇌를 가지고 세계화 시대를 살아야하니 현대인의 삶은 고달플 수 밖에 없다. 만약 우리의 뇌가 복수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최적화되어있다면 외국어를 배우려고 그 많은 시간과 돈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기의 뇌가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모국어를 다루는 뇌신경세포가 먼저 자리를 잡는다. 외국어를 처리하는 뇌신경세포는 인접한 곳에 터를 잡고 모국어를 담당하는 영역과 교신하는 통로를 만든다. 우리는 보통 모국어로 생각하기 때문에 외국어를 담당하는 뇌 영역은 모국어를 처리하는 영역에 기대지 않을 수가 없다. 두 영역사이에 정보를 교신하는 통로가 넓게 형성되고 교신이 원활하게 이루어질수록 외국어를 더 유창하게 할 수 있다. 통로가 아주 넓어져서 두 영역이 아예 한 덩어리처럼 되면 복수의 언어를 하나의 언어처럼 다룰 수 있다. 다중언어 능력자의 뇌는 그렇게 되어있다. 그래서 단순히 복수의 언어를 구사하는게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것도 여러 언어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국어의 기득권이 확고부동한 것은 아니다. 어린 나이에 다른 언어에 더 많이 노출되면 먼저 자리를 잡았던 모국어가 밀려나기도한다. 외국에서 오래 산 유학생이나 교민 자녀 중에는 우리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태어나 우리말을 제대로 배운 후에 부모를 따라 외국으로 간 아이들도 현지 유치원에 다니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말이 흔들린다. 가정에서 부모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보다 유치원에서 현지어로 의사소통하는 시간이 훨씬 길어지기 때문이다. 두 언어 모두 잘하는 아이도 있지만, 둘 모두 엉망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다음은 뇌과학과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KAIST 김대식 교수의 이야기다. 그는 열두 살 때 독일에 갔다. 처음에는 독일어를 전혀 못했기 때문에 독일어부터 배우고 김나지움을 다녔다. 독일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수준 높은 독일어, 영어, 라틴어, 한국어를 구사한다. 한국어 문장을 매끄럽게 쓰고 말도 정확하고 빠르게 한다. 다중언어 능력자일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어떻게 우리말을 지켰느냐고 물어보니, 뜻밖에도 거의 잃어버렸다가 노력해서 겨우 되찾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한다. 그토록 언어감각이 좋은 사람이 열 두살까지 한국에서 자랐는데도 모국어를 잃을 뻔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초등학교 취학 전 어린이의 ‘영어몰입교육’은 아주 위험한 선택이다. 얻는 것은 적고 ‘불확실’한 반면 잃는 것은 크고 ‘확실’하다. 영어를 잘하면 좋다는 건 분명하다. 대학교를 가고 취업을 하는데 유리하다. 지구촌에서 유통되는 지식과 정보 가운데 영어로 말하고 쓴 것이 절반을 넘는게 현실이다. 하지만 영어만 잘 한다고해서 다 잘되는 건 아니다. 영어를 익히려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버린다면 차라리 영어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무엇보다도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그래야 창의적으로 생각하면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어린이 영어몰입교육은 우리말로 생각하는 능력을 훼손할 수 있다. 언어는 단순한 말과 글의 집합이 아니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말하고 쓰는 것 뿐 만아니라 생각하는 데에도 언어가 있어야한다. 모국어를 바르게 쓰지 못하면 깊이 있게 생각하기 어렵다.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글을 제대로 쓸 수 없다. 모국어를 잘하지 못하면 외국어도 잘하기 어렵다 .외국 유학을 하는 경우에도 외국어를 물 흐르듯하면서 모국어가 신통치 않다면 차라리 그 반대가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