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일간지 정치부 기자로 일했던 그는 자기 자신을 '이면이 없는 인간'처럼 되었다고 했다. 스트레이트 기사를 많이 쓰는 기자 훈련을 하다 보니 모호한 것을 모호한 채로 쓰지 못한다는 설명이었다. 모호한 현상을 선명하게 규정하는 것, 그러한 관찰법을 배운 것이 기자 훈련의 결과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일한 곳은 매주 1회 32면짜리 주간지를 발행하는 종교 신문사였다. 데스크를 제외한 취재기자는 모두 6명이었다. 하는 일의 재료는 달랐지만, 나 역시 그곳에서 현장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는 훈련을 했다. 그 문장들은 전에 내가 쓰던 문장들과 전혀 다른 문장들이었다. 정해진 격식이 있었고, 그 틀에 맞춰 내용을 짜 맞춰 넣기만 하면 되는 스트레이트 기사 쓰기는 그리 많은 생각이나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현장을 취재하고 관찰하여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 나를 통과한 현장의 상황들은 정해진 틀에 맞춰진 공산품이 돼 쏟아져 나왔다. 한 주에 원고지 200매가 넘는 원고를 쓰기도 했다. 영세한 종교 신문사에서 나는 1인 3역을 소화했다. 펜 기자, 사진기자, 그리고 운전기사 역. 나는 당일치기로 강릉이라던가 주문진, 혹은 나주 같은 장거리를 운전해 가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와중에 현장을 세밀히 취재하고 인터뷰도 따야 하는 원맨쇼를 했다. 때로 소프트한 미담기사나 박스 기사를 쓰기도 했지만, 그러한 글들이 내 글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모두 너무 그리운 순간들이다. 그 글들도 나였다.)
"기자로서 쓰는 글이 오히려 나를 소외시켰습니다. 마치 내가 글 쓰는 기계가 돼 공산품 같은 글을 찍어내는 것 같았어요. 소설 한 편 분량의 기사를 쏟아내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치솟았습니다. 쓰느라고 쓰는 걸 못하는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그의 기자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그 보다 훨씬 약한 강도의 훈련을 짧은 시간 하긴 했지만, 그의 모든 말들이 공감이 돼 그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야마를 뽑는다'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는 것인지, '공산품을 찍어내는 느낌' 같은 그의 표현들은 기자 생활을 해 보지 않은 이라면 100퍼센트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첫 소설도 제가 기자로서 가장 바쁜 시절에 썼습니다. 그날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밤 11시가 넘었더군요.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컴퓨터를 켜고 앉아 첫 소설 문장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첫날은 자신의 몸에 문신으로 새겨 넣었다고 했다. 그 지치고 바쁜 일상, 내 삶이 아닌 다른 이의 삶을 사는 것만 같은 날들. 내 글이 아닌 다른 이의 글을 대필하는 듯한 무기력감. 잠 못 들던 밤들,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 피곤한 몸. 보이지 않는 앞날. 막막했던 그 밤들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급기야 그 시절 그가 된 것 마냥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