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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아빠 Jun 05. 2023

분가를 원했던 이유

나와 어머니만의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2005년 직장인이 되고 곧 분가를 할 수 있었다. 

첫 직장에서 약 13평형 독신자 숙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난 분가를 한다는 것이 매우 행복했다.

이제야 어머니와 지옥을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내 가정은 1주일에 4일이 불운이었다. 

누나 3명, 아버지 1명이 덕분에 말이다. 

큰누나가 1991년부터 가출을 시작한 이후 나머지 2명도 차례로 집을 떠났다.  

집을 나간 순서대로 누나들은 집에 빚쟁이들의 전화가 걸려오게 만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나는 전혀 알 수 없는 

누나들이 구매했다는 옷값 또는 숙박비 등  

당시 아버지 월급의 전부를 지불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부모가 갚아달라는 독촉전화였다. 


아버지는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어머니에게 맡겼다. 

누나들 때문에 발생된 모든 문제들 까지도 말이다. 

빚쟁이들 전화를 전혀 받지 않았고 

간혹 전화를 받을 때는 남의 자식에 대한 일처럼 느껴졌다.

술을 마시고 들어올 때는 

어머니 때문에 이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주정을 부렸다. 

쥐약을 들고 다니며 결혼 안 해주면 죽는다고 했던 한 사내가 말이다.  

나도 한 아이의 아빠가 되고 아버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자 했다. 

그 과정의 결론은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그 사이 어느 한 지점에 위치한 사람이다. 


이런 집안 분위기 덕에 나는 사춘기가 없었다.  

부모가 반대한 결혼이지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어머니의 소망이 깨진 것을 보며 나라도 어머니를 즐겁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공부 잘하는 친구도 사귀고 공부도 배우고 학교에서 성적을 올리며 

어머니를 기쁘게 했었다. 

그 시기의 내 사춘기는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 같다. 

간혹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날에는  

경쾌한 음악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대전천 주변을 걸으며 스트레스 해소를 했다.   


중학생 2학년 때부터 

아버지가 어머니께 폭력을 행사하려 할 때 내가 막아섰다. 

그때마다 내게 했던 아버지의 말

‘너도 니 어미랑 나가. 어딜 노려봐 이놈아!’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속으로 이 말을 되새겼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겁니다.

당신과 누나들을 피해서 어머니와 영원히 사라지는 것...’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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