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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두 Mar 01. 2021

주말 온천여행과 천 개의 샘

여행의 묘미는 우연


    최근 일터에 이런저런 변화가 있어 나와 남편은 몇 주간 번잡한 시간을 보냈다. 피로가 쌓여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거기에 밸런타인이 더해지자 둘이 주말에 어디든 훌쩍 다녀 오자는 말이 나왔다. 등산이나 낚시를 하기에는 날이 너무 추워 고민하던 중 온천 생각이 났다. 집에 자쿠지며 욕조가 있어도 진짜 온천을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을 꺼내자 남편도 찬성했다. 이 근방에는 천연 온천이 숱해서, 두 시간 거리 안에도 일곱 개가 넘는 온천이 있었다. 사흘간 주변에 묻고 인터넷을 검색해 본 우리는 45분 정도 떨어진 곳을 골랐다. 온라인상 수질 평이 좋았고 무엇보다 한 시간씩 대여 가능한 개인실이 수십 개 있어 일찍 가기만 한다면 조용히 휴식을 취하기에 적격일 듯했다.


    개인실이 대여는 예약이 되지 않고 선착순이란 말이 주말에 가는 만큼 불안하기는 했지만, 공공 풀만 보아도 물 미끄럼틀이며 높은 다이빙 대, 타고 놀 수 있는 물놀이 기구가 마련되어있는 근처의 다른 온천보다 덜 시끄러울 거란 기대도 있었다. 주차 후 온천까지 따로 한참 걸어 올라갈 필요가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행선지를 정한 나와 남편은 주말이 오기까지 며칠을 들떠서 보냈다. 오면 가면 간식으로 먹겠다고 전날 밤 속에 매콤한 닭고기를 넣은 주먹밥까지 빚었다. 둘이 따끈한 밥에 참기름이랑 소금을 섞고 있자니 소풍 전날 김밥 싸는 기분이라 재미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시엄마가 나와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음료를 두 병 챙겨주시기도 해서 더 그랬다.


    토요일 아침, 우리는 개인실 대여를 목표로 일찍 일어나 출발했다. 해가 뜨기는 했어도 아직 어슴푸레했다. 운전 연습을 할 겸 내가 오고 가는 길 운전을 다 하기로 했었는데, 빛이 생각보다 더 적어 가는 길은 남편이 운전하게 됐다. 고속도로로 나가니까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나는 내가 운전하지 않는 걸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가는 길에 죽 이어진 황야


    약간 컴컴한 상태에서 나는 초행길, 남편은 15년도 전에 다녀온 길을 가다 보니 길을 잃었다. 특별히 이정표가 될 건물 없이 텅 빈 밭, 축사 또는 황야가 이어져서 더 그랬다. 출발 전에 확인한 길 이름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계속 가보니까 이름만 알던 소도시가 나왔다. 종종 시아빠가 아미시 수제 아이스크림을 사 오는 곳이었다.


    동서남북 파악도 힘들어하는 길치인 나는 도시 이름을 보고도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서브웨이 주차장에 차를 세운 남편은 머릿속으로 지도를 몇 번 그려보더니 어디쯤에서 길을 반대로 들었고 어떻게 가면 가려던 곳에 갈 수 있는지 알겠다고 했다. 나는 그저 알아서 하라고 그랬다.


    다시 길에 오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협곡이 펼쳐졌다. 나는 기대하지 못한 장관에 눈을 크게 떴다. 천 개의 샘(Thousand springs)이란 곳으로 여름이면 끝없이 이어진 바위 절벽에서 수천의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곳이었다. 길을 잃지 않고 본래 보아둔 방향으로 쭉 갔다면 이리 지나가지 않았을 거란 말에 길을 잃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창백한 겨울 협곡


    계절이 가문 겨울인지라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경관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협곡 가운데로 스네이크 리버, 그러니까 콜롬비아 강으로 흘러가는 물줄기 중 가장 큰 줄기가 구불구불 흐르고 겨울 해를 받은 마른나무가 창백한 색으로 반짝였다. 강물 위로는 수많은 철새가 점처럼 앉아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온천에 가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한동안 경치 감상에 푹 빠졌다. 이렇게 가까이에 이런 곳이 있었는데 모르고 있었다니 억울할 지경이었다. 남편도 자기가 왜 이런 경치를 잊어버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가야 하는 길을 무시하고 한참을 달리다가 협곡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빠져나가게 됐을 때에야 차를 돌려 온천으로 향했다.


협곡 안쪽 강가에 있는 온천 가는 길


    45분 거리를 두 시간 가까이 헤매어 간 바람에 온천의 개인실은 전부 나가고 없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고, 특히 러시아계 대가족이 와 있었는데 열댓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무척 시끄러워서 정작 온천의 즐거움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물은 좋았지만 소음 때문에 시시각각 더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온천물


    나와 남편은 한 시간 반 정도를 버티다가 온천을 떠났다. 무슨 기운이 그렇게 넘치는지 애들은 갈수록 더 시끄러워졌고, 공공예절에 대한 생각이 미국인과 좀 다른지 함께 온 어른은 다른 사람이 전부 인상을 써도 애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우리가 풀을 떠날 때 다른 사람도 여럿 같이 일어났다.


    돌아오는 길에도 우리는 다시 한번 아침의 협곡을 통과했다. 처음 지날 적에 감상에 급급해 찍지 못했던 사진도 조금 찍었는데, 사진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담기지 않아 아쉬웠다. 온천 경험이 기대만큼 좋지 못했던 게 아쉽기는 해도 이렇게 멋진 경치를 구경했으니까 됐다 싶었다. 그제야 꺼내먹은 주먹밥도 맛있었다.


    다만 온천에서 피로가 풀리는 게 아니고 누적된다 싶던 건 착각이 아니었는지 나와 남편은 짧은 여행 후 한동안 각자 앓았다. 남편은 신경성 변비가 와서 며칠 고생했고 나는 입술이 심하게 쥐었다. 약을 썼는데도 주를 훌쩍 넘기고 다른 데로 번지려고 들어 속을 썩였다. 그래도  둘 다 다음에는 어딜 또 가볼까? 하는 걸 보면 좋은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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