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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캐쳐 May 14. 2021

자소서만 10년째 쓰는 중 5회-단점

저의 단점은 고치기 귀찮을 뿐, 극복할만한 수준의 귀여운 것입니다




당신의 장점과 단점을 쓰시오.


우리는 안다. 단점을 묻는 질문에 진짜 단점을 솔직하게 적으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너무 게을러요."

"저는 너무 이기적입니다."

이렇게 쓰는 사람은 없다.


적당히 노력하면 고칠 수 있을 정도의 단점.

그냥 귀찮아서 안 고치는 것뿐이지,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개선 가능한 게 내 단점이다.

하는 그런 단점을 써야한다.

                                                                                                                                              

 지방 방송국의 범죄 재구성 드라마 연출부에서 스크립터로 근무했습니다. 스크립터란 배우의 대사와 움직임 하나부터 촬영 현장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사람입니다. 꼼꼼한 성격을 필요로 하는 스크립터를 하기 위해서는 메모를 하는 습관, 극의 연결성을 위해 모든 대상을 유심히 살펴보는 관찰력을 길러야 했습니다. 저의 실수로 촬영 시간이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매 순간에 더욱 집중하며 꼼꼼히 메모했습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고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저의 단점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자기소개서 답변 일부 발췌    


나의 단점 답변에는 스크립터 시절의 이야기를 녹였다.



지방 메이저 방송국이니 서울의 외주 프로덕션에 있을 때보다 당연히 나은 환경일 줄 알았다.

촬영 현장에 갔는데, 차장 PD, 메인 PD, 조연출, 음향, 조명, FD, 헤어 메이크업 담당, 배우 그리고 나.

이 적은 인원이 내가 보던 그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나는 스크립터이지만 매주 주말마다 소품을 사러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고, 가끔 반사판도 들었고, 붐 마이크도 들었고, 배우를 챙겼다.

반사판을  때는 조명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해서 그냥 들라는 대로 드는데, 반사판이 너무 무거워 손이 덜덜 떨려서 배우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두워졌다 해서 많이 혼났고,  마이크는 키가 작아서 높이 들다가 힘이 빠지면 슬금슬금 내려와 카메라 앵글에 걸려서 혼났다.  재밌었는데  하나 스트레스가 바로 소품을 사러 다니는 .

월, 화, 수, 목 뙤약볕에서 야외 촬영을 하느라 힘든데 금요일엔 방송국에 들어와 에어컨 밑에서 시사하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 시사가 끝나자마자, 다음 주 촬영 구성안을 보고 소품을 사러 돌아다니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간이었다. 주어진 적은 예산으로 소품을 사기란 융통성 없는 내게 제일 힘든 시간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딱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임신 표시(빨간 2줄)가 된 임신테스트기를 구해야 하는데, 그때 나는 대학생이었고 주변에 임산부가 없었다. 빨간 2줄이 임신이라는 것도 잘 몰랐을 정도로 무지했다. 그런 내가 임신테스트기를 약국에서 쉽게 구했지만, 빨간색 2줄을 만들어 낼 방법을 몰랐다.

처음엔 쉽게 카트리지 위에 빨간 싸이 펜으로 그으면 될 줄 알았는데 카트리지 위 딱딱한 플라스틱이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겨우 부쉈더니 수성사인펜이 카트리지에 번진다.

하...

무려 10년 가까이 전의 일인데도 그때를 생각하니 막막하다.

그래서 또 약국에 가서 새로 산 임신테스트기로 2줄을 만드려고 보니, 또 다르게 생긴 제품이라 하...

어째 어째 조잡하게 만들어갔다.

결국 촬영할 때 그 임신테스트기는 클로즈업을 해서 쓸 수 없었고,

그냥 배우가 임신테스트기를 바라보는 표정 연기만 클로즈업해서 쓸 수 있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장면을 촬영해야 했다.

유골을 실제로 본 경험이 있지만, 슬픔에 젖어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할리가...

유골함은 어째 구했는데 가루가 문제였다.

그걸 어떻게 만들지 깊이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살 소품이 너무 많았기 때문.

단순하고 귀찮았던 나는 밀가루와 회색빛이 나는 가루를 섞어 준비했다.

바닷물에 뿌리며 반죽이 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나는 그때 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이 적어서 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육지에 있었는데 그때 배에 있었다면...

끔찍하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지금 생각하면 나는 참 일 못하고, 형편없는 스크립터였다.

그래서 자소서에선 내가 열심히 일한 점만 강조해서 쓴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욕먹으면서 힘들게 일하고서 받은 월급은 40만 원.

충격받았다.

내가 일주일 내내 그 작품을 위해 시간을 썼는데, 일주일당 주급이 10만 원이라니.

설상가상으로 나는 발목을 심하게 접질렸고, 깁스를 해야 했지만 촬영 현장에 가기 위해 반깁스를 해달라 그랬다.

반깁스를 한 채, 절뚝거리며 촬영 현장을 누볐다. 솔직히 이때 스크립터 일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좀 좋았다. 하지만 스탭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예 움직이지 않을 순 없었고, 아픈 티를 덜 내며 전보다 활동량을 적게 움직일 뿐이었다.

주말은 여전히 소품을 구하러 다니고, 촬영 장소 헌팅도 하러 돌아다녀야 했다. 두 다리가 멀쩡해도 힘든 업무량인데 한쪽 다리에 의지해서 하기엔 너무나 힘들고 더워서 지쳐갔다. 촬영할 땐 잘 몰랐는데, 밤샘 촬영 후, 새벽에 탄 택시에서 참 많이도 울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씻고 나와 쪽잠을 자려해도 발이 퉁퉁 부어 아파서 잠 못 들고 끙끙대고 울다 두 시간 뒤에 다시 옷을 입고 절뚝절뚝 출근 준비를 하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제발 그만두라고 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면 인턴을 거쳐 정규직이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열심히 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는데, 내 발목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고,

겨우 짬을 내 찾아간 병원에서 다시는 구두를 못 신고 평생 절뚝거리고 살 수 있으니 쉬라는 한마디에 나는 짧은 인턴 생활을 더 빨리 끝내게 되었다.


참 슬펐던 것은, 그 회사에 있는 사람들 아무도 내 다리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비어있는 스탭 때문에 더 힘들어질 본인들과 촬영 현장을 걱정하기에 바빴다.


어린 나이에 나는 방송국 사람들과 방송 시스템에 정이 떨어졌고

다시는 방송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내 몸은 내가 챙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참 민폐덩어리 인턴이었는데.

내 주제를 모르고, 그땐 어려서 세상 탓하기만 바빴다.

그리고 방송과 전혀 다른 근무 환경인 곳에서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더운 날 시원한 실내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

추운 날, 따뜻한 실내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

체력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 근무 환경.


우연히 교내 우체국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공고를 보고 지원을 했고

나는 반깁스를 한 다리가 일을 하는데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 우체국 접수창구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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