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신조 및 성장환경에 대해 기술해주십시오.
학점 관리에 실패한 나는 어필할게 경험뿐이었다.
실제로 나는 20대에 여행을 거의 하지 못했다.
첫 해외여행도 29살에 처음 가보았다.
대신 나는 직장을 여행하듯 다양하게 거쳐왔다.
잡지를 보다가
세상이 주는 기회를 맛보다
라는 표현이 너무 멋져서 메모해두었다가 나의 자소서 단골 답변 멘트로 쓰고 있다.
세상이 주는 기회를 맛보기 위해 방송 조연출부터 지금의 행정 업무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PD가 되려면 당연히 신문방송학과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대나 간호대를 나와야 하는 의사/간호사도 아니고
로스쿨을 나와야 하는 변호사/검사도 아닌데
신방과가 아닌 학과를 선택하면 PD가 되는 길이 훨씬 어렵다고 생각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단순했던 어린 시절의 생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PD들의 대학 전공을 보면 신문방송학과가 거의 없다.
입시설명회를 다니며 각종 편집 기구와 카메라 장비들이 갖춰진 학과실을 보며
지방에서 나름 신문방송학과로 유명한 학교로 겨우 진학했다.
하지만 막상 입학을 하고 보니 장비를 사용하기는커녕
경제학원론, 사회학개론, 영어 수업 등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별 다를 바 없는 과목들이 필수 이수 과목이었다.
사회, 경제 죄다 내가 싫어하는 과목들.
나는 큰 실망을 하고선 혼자 교외에서 어릴 때 즐겨보던 청춘 시트콤 <논스톱>을 찍었다.
그렇게 신문방송학과를 간절하게 바랐던 단순하고 어리석었던 신입생은 교내에서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다.
사회 전반적인 흐름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질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PD에겐
필수 소양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덕분에 1학년 성적은 처참했다.
F(ail) 학점이면 실패를 딛고 성공을 꿈꾸기라도 하지
D(eath) 학점은 말 그대로 심폐소생술도 소용없는 점수였다.
이 못난 성적이 나의 어정쩡한 스탠스를 잘 보여주고 있다.
2학년이 되었더니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영상 편집 수업, 제작 수업, 취재 보도 등 실습 과목이 많아졌고
나는 뒤늦게 교내 인싸가 되기를 바랬다.
각종 MT에 참석해서 신입생 후배들, 복학생 선배들과 친해졌다.
귀찮다고 여겼던 시사상식 시험 준비도 선후배들과 스터디를 꾸려 같이 공부하고
실습 수업 때 팀을 꾸려 함께 작업하기도 하고
주말엔 편집을 하며 떡진 머리로 컴퓨터 앞에서 밤새며 제정신이 아닌 채로 대화하며 허허 웃기도 했다.
이게 바로 내가 고등학교 때 그렸던 나의 대학 생활이었다.
그렇게 1년 동안 목표 없이 해당 학기 수업만 열심히 들었더니 불안해졌다.
곧 3학년이 되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나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지?
막막했다.
나는 기획안을 뚝딱뚝딱 써내는 아이디어가 있었으나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줄 도구인 카메라도 잘 사용할 줄 모르고
편집도 학교에서 배운 아주 기본적인 것만 할 줄 알았다.
특출나게 잘하는 게 없어서 자랑할만한 것이 없는 아이였다.
그리고 당시 PD는 SKY, 서성한 대학교를 나온 수재들이 겨우 되는 직업인 것을 알게 된 시기였다.
그래서 여러 고민을 하다 연극영화학과 복수전공을 하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복수전공이 흔하지만
1학년 때 망쳐버려 긴 복구작업을 할 필요가 있는 내 성적으로는 과감한 결정이었다.
연극영화학부의 영화연출 전공 수업을 들으며 카메라, 조명, 편집, 시나리오 작성 등을 배웠다.
신문방송학과에서 사실 조사를 기반으로 스트레이트 혹은 탐사보도 기사 작성을 할 때와
연극영화학과에서 허구를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흥미롭게 그려내는 시나리오 작성법은 매우 달랐다.
신문방송학과에서 삼각대를 이용해 카메라를 고정시켜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듯 촬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법을 배웠다면
연극영화학과에서 핸드헬드 기법을 이용해 흔들리는 앵글로 긴박한 현장 분위기와 혹은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 방법처럼 다양한 카메라 촬영 기법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신문방송학과에서 화이트밸런스를 맞춰 안정적이고 표준화된 빛으로 촬영하는 법을 배웠다.
연극영화학과에서 다양한 조명으로 밤에도 낮처럼 밝게, 밤에도 낮처럼 밝고 따뜻하게
현실을 내 맘대로 조작하는 법을 배웠다.
상반되는 두 학과의 교육 차이가 나를 더 흥분되게 했다.
빨리 촬영 현장에 나가고 싶어 졌다.
그래서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서울의 한 외주 프로덕션에서 조연출을 구하는 공고를 보고
무작정 면접을 보러 갔다.
22살의 어린 여자아이가 사투리를 쓰며 어른스러운 척 면접을 보고 앉아있으니
무모해 보여서였는지, 열정이 대단해 보여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출근을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너무 기뻤고
나는 부모님의 걱정 속에
부모님과 함께 짐을 싸들고 서울에 집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어차피 촬영하느라 집에 있을 시간이 없을테니
깨끗하고 잠만 잘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10년 전에 요즘 원룸 월세와 맞먹는 금액의 신식 여성 고시원에 들어갔다.
김포공항과 가까운 역이라 나 빼고 전부 키 크고 예쁜 스튜어디스들이 주로 사는 곳으로.
다음 날 새벽,
드르륵 거리는 캐리어 바퀴 소리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출근하는 옆방 언니들의 출근 소리를 들으며 일어났다.
나는 긴장되는 몸을 일으켜 방에서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새로 산 높은 굽의 운동화를 신고, 흰 와이셔츠에 나름 단정하다고 생각한 청바지를 입고
조연출로 첫 출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