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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정 Mar 09. 2021

자정에 옷장을 정리하며

시간이 멈춘 것은 떠나보내요.

피곤한 성격이다. 연말, 연초, 기후가 바뀌는 시즌 혹은 신월이나 만월 시기 등등 기점이 되는 때에는 어김없이 무언가를 정리한다. 방을 바꾸거나 가구 배치를 대대적으로 옮기기도 하고, 작게는 수납장 속 물품의 위치를 변경하거나 정 시간이 안되면 식물 친구들의 가지치기라도 한다.


경칩이 지나며 확연히 계절의 이동이 느껴지자, 정리 본능이 꿈틀댔다. 지난 시즌에도 한 차례 정리한 옷장은 전년도 대비 절반밖에 남지 않는 옷들로 널럴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빈칸 보다는, 남은 옷들 중에 손이 잘 가지 않았던 것에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한 주 정도를 옷장문을 열고 닫으며 환경 조사를 끝냈고, 엊저녁 드디어 거사를 치르게 되었다.



내 정리 노하우는 간단하다.

옷의 시간이 멈춘 것들과 이별한다.



나는 옷장으로 쓰는 붙박이장에 24시간 공기청정기와 작은 무드등을 켜 둔다. 옷이 먼지나 묵은 어둠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상하게 그 옷을 입은 나도 쳐지기 때문이다. 좋은 컨디션으로 옷장에서 살고 있던 옷에는 생생한 기운이라는 게 느껴지는데, 그런 옷을 입으면 뭔가 가장 든든한 아이템을 장착한 기분이 든다. 버리게 되는 옷들은 나의 이런 보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다하거나 에너지를 상실한 것들이라 하겠다.


이번 겨우내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던 점퍼와 니트, 올봄에는 애정하지 못할 것 같은 바지며 셔츠 등등을 골라내었다. 양말과 속옷도 즐겨 입는 몇 세트 외에는 과감하게 솎아 내었다. 쌓여있던 에코백도 딱 세 개만 남겼다. 그리고 이 모두를 잘 접어서 대형 더스트백에 차곡차곡 담았다. 시간이 멈춘 무엇과의 이별식은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된다는 게 또 하나의 지론이다. 가능한 한 예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공유했던 과거의 추억에 대한 존중의 태도이다. 내가 그를 첫눈에 인연으로 알아보고 나의 소유로 받아들이며 시간, 돈, 노력을 기울였던 때를 회상하는 과정을 가지기도 한다. 어제는 그렇게 정리의 세리머니가 끝나니 자정이었다. 나는 산타처럼, 선물주머니 같은 그것을 어깨에 짊어지고 분리수거함에 가져다 두었다. 누군가에게 다시 가서, 그것들의 시간이 재생되었으면 싶었다.


한 가득 버리고 왔는데, 만족감이 차오른다. 정리 이후의 개운함과 정말 '개운'할 것 같은 느낌 때문인 걸까. 시간이 멈추어 버린 집착들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그만큼 되찾게 된 여백에서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여유 공간으로 생긴 통풍감, 생생한 기분도 갖게 된다.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들여놓을 수 있는 기초 환경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붙잡고 있는 오랜 무엇들

아낀다고 하지만,

정작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묵혀둔 그것들

시간이 멈춘 그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자.


-

바이 바이,

정말 섭섭하지만

우리 함께하는 동안 좋았어요.

고맙습니다.

덕분이었고요,

그런 기쁨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해요.

하지만 우리 흘러갑시다.

멈추지 말고, ro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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