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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정 May 02. 2021

너 하나 나 하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오늘 몹시 그리운 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가 시작이었고

"저는 늘 변화가 많죠."가 중간말이었고

"멀리 계시네요.."에서 마음을 좀 두었다가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로 마침표를 찍었다.


오후 2시 22분, 통화 시간 3분.




사월은 개화라는 축제를 준비한 봄꽃들이

한껏 흐드러지는 황홀지경의 시간이지만,

반대급부가 늘 있었다.


사월은 상반기 과업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시기다. 서로의 이를 맞추는 과정에서 뭔가 애매한 더딤이 생기며 프로젝트 관계자들에게 불편한 긴장감이 있는 때다. 대개의 회사에서는 연봉협상이 끝나 머무를 사람과 떠날 사람이 나뉘고, 연봉 인상자의 창창함과 연봉 협의가 잘 안된 사람의 그림자가 교차되는 시기다. 무엇보다 동시대인들이 4월에 목도한 슬픔들도 컸기에 왠지 모를 착잡함 심경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부로 나의 4월에 대한 기억이 달라질 것 같다. 어떤 의도 없이, 그저 나의 감정에 충실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던 4월의 마지막 날. 때가 되어 터뜨린 꽃망울 마냥, 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흐드러졌던 봄꽃들이 지고 초여름의 꽃들이 망울을 틔우듯, 피고 지는 내 마음의 꽃을 볼 수 있었다. 무언가를 향해 활짝 피우고 또 접어 들이는 일, 자연의 일처럼, 나의 마음에도 계절이 오가게 되었다. 내 인생 처음 맞는 새로운 계절이 된 거다.


두 달 전이었던가.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전시를 보았다. 1930년 전후에 왕성한 활동을 했던 작가들이 서로에게 영감을 준 작업과 그 관계들에 대해 조명한 전시였다. 식민화된 국가의 아픔과 광복 이후의 근현대까지 엄청난 변혁의 시기를 겪어낸 이 예민한 예술가들에게 '사념의 연결'과 '동류의식'은 자연스러운 피난처였던 것 같다. 프랑스의 에꼴 드 파리처럼 다방과 술집에 모여 앉아, 부조리와 모순의 현실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생각을 공유했다. 그 당시 활동했던 예술가들 중에서 특히 성북동 비둘기의 '김광섭' 시인과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 작가의 관계는, 내게 좀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시인과 화가는 1930년대 성북동을 공유했던 젊은 시절을 보내고, 나이가 들어서는 화가는 뉴욕에서 시인은 한국 땅에서 살며 영감의 관계를 나누었다. 그들의 편지를 들여다보면 참으로 소소한 얘기들이 섬세하게 놓아져 있어 그들 관계의 소중함이 더 느껴진다.


 

어느 날 시인은 '저녁에'라는 시 한 편을 쓴다. 병이 악화되는 상태에서 여러 회환이 담긴 시인의 글은, 화가에게 애잔한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시의 한 문구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으로 연작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심상이 그렇다. 캔버스 위의 무수한 별은 마치 존재와 존재가 만나 서로 빛을 발하며 한 생애를 살고 또 이어지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듯하다. 전시에서 나는 그 작품 앞에 서서 한 동안 서성였다.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캔버스에 유채, 236cm×172cm, 1970


이 글을 4월 마지막에 시작하여, 5월의 첫날에 마무리한다. 푸른 달은 봄이 달궈 놓은 우리의 설렘에 찬란한 볕과 상쾌한 바람을 선물하고 있다. 그러면서 무수히 속삭인다. 무언가를 향해 활짝 피워보라고.. 자연의 일처럼, 마음에도 계절을 들여 보라고 말이다.


5월의 시작을,

나는 이렇게 열어본다.

여러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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