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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정 May 20. 2021

이별의 플랫폼에서

꽃처럼 피고 지다.

장례를 모두 치르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지난 약 한 달은, 돌아보니, 이별의 플랫폼에서 지낸 시간이었다.


4월 중순에 부산에 갔을 때, 그녀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건강 관리 잘하고, 돈 잘 모아 놓고, 사랑하며 살아라."


그녀는 경북 봉화 소천면에서 태어나 6.25로 온 가족을 전쟁통에 잃었다. 전쟁 경험담은 생생했다. 간혹 그때를 이야기하면, 소리와 시각으로 진하게 남은 기억이 특유의 과감 없는 표현력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피난 온 부산에서 이모 밑에서 몇 년을 살다가,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때 나이 열여섯. 상대는 서른여섯. 스무 살 차이가 나는, 딸과 아빠 같은, 부부였다.


부산 토성동을 기반으로 가정이 꾸려졌다. 남편은 생활력이 강하고 친족들을 안아서 살피는 전형적인 이북 피난민이었기에, 경제적으로도 집안 친족 구성에서도 빠르게 안정된 기반을 만들었다. 그 사이 아이도 딸 하나에 아들 둘을 낳았다. 실은 딸이 한 명 더 있었다. 어린 그 아이는 유난히 예뻤고 억센 부산 사투리를 쓰지 않고 독특한 어투로 곱게 말했으며, 영특했다 한다. 미인박명이라고, 그 아이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급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이름은 '영이'였다.


남편은 배운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그녀는 한글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학력이었는데, 그 누구도 그녀를 무식하다 하지 않았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해도 셈을 틀리는 일이 없었고, 집안 대소사를 기억하고 치르는 일에 놓치는 부분이 없었다. 늘 맵씨가 좋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꼭 화장을 곱게 했고, 늘 단정한 머리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색에 대한 감각도 좋고 옷도 잘 지어서, 늘 고급스럽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그녀의 나이 마흔 쯤에는 누가 봐도 부잣집 교양 있는 마나님이 되었다.


아들들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고, 딸과의 관계는 원만치 못했다. 딸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모녀 사이는 오랜 세월 동안 애증이 쌓였고, 나이가 들어서야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녀는 부모 사랑을 받지 못한 전쟁고아였기에 자식 사랑에 대한 지혜로운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애써서 그들의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 도왔고, 자식들이 성장하고 성혼하며 각자의 인생을 살게 되면서는 그들에게 실망과 배신을 느끼는 나날들도 있었다.


남편은 88년도에 운을 달리했다. 아직 그녀가 예순의 나이로 젊음이 남아있을 시절이었다. 혼자가 된 그녀는 그간 남편 수발에 보지 못했던 세상을 즐겼다. 여행도 참 많이 다녔다. 그리고 평생 숙원이던 글공부도 열심히 하여, 은행이며 공공기관에서도 혼자 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그녀는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활력 넘치는 매력적이고 성숙한 황혼이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동네에서 식자 좀 든 그는 훤칠한 외모의 같은 또래의 남자였다. 오래전에 안 사람을 잃고 홀로 살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느끼지 못한 연애와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었다. 둘은 금세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양가 자식들의 동의 하에 집을 합쳐서 살게 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났다.


한 달 전이었다. 부산에 그들을 뵈러 갔고, 함께 해운대 여행을 했다. 언제 이렇게 낯설 만큼 화려한 동네가 되었나 싶었던 해운대는 그들에게 무색했다. 지팡이에 의지하고도 조심스럽게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 해변 구경의 시간보다 숙소에서 고요히 눕거나 쉬는 시간이 더 중요한 시절이 되었다. 특히 같이 사는 그분이 얼마 전 낙상이 있으면서 급격히 나빠진 컨디션으로 급성 치매까지 온 듯했다. 그들에게는 그 여정이 마지막 동반 여행이었다.


같이 사는 분은 요양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홀로 지내게 된 그녀는 남은 노후를 딸과 가까이서 보내고 싶어 했다. 4월 28일에 그녀는 딸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5월 3일, 그녀는 급격히 나빠진 컨디션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사나흘 동안 여러 검사를 받았고, 혈액에 염증 수치가 높다는 결과 외에 크게 나쁜 상황은 없었다. 그러곤 며칠 지나, 병원성 폐렴에 걸려 위험한 상황이 왔지만 잘 치료되어 곧 퇴원을 앞두고 있었다.


5월 14일, 오전부터 그녀와 딸의 전화 왕래가 있었다. 술 한잔이 먹고 싶다, 매실도 가져오너라, 여기 와서 간병인은 왼쪽에 눕고 너는 오른쪽에 누워 같이 자자.. 딸에게 오랜만에 또렷또렷하고 기운 좋은 목소리를 전했다. 밤 8시 넘어 다시 전화가 왔다. 가슴이 좀 답답하다, 숨이 잘 안 쉬어진다… 뚝..


잠시 뒤에, 간병인으로부터 그녀가 맥박 이상으로 급하게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는 연락이 왔다. 밤 9시, 중환자실 담당의사에게서 심정지가 있어서 심장마사지를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고 또 20여 분. 더 이상 반응이 없다는 얘기와 함께, 병원으로 가족 호출을 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그녀를 만났다. 아직은 마지막 소생 장치를 연결한 모습으로, 누워있던. 나는 그녀를 만져보았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그녀의 몸, 고운 손이 보였다.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나는 입 밖으로 터지는 울음을 그냥 놔두었다. 담당의사는 태어난 연월일시처럼 생을 달리 한 시각의 숫자들을 읊으며, 사망선고를 했다.


그녀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싶었다. 그녀가 병원에 있을 때, 가족들은 혹시나 더 이상 수발이 힘들어지는 상태가 오면 요양병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시설 등급을 받아야 했다. 그 신청서를 내가 썼어야 했다. 그녀를 봉양하는 일이 힘들고 어렵다는 글이었다. 나는 술이 필요했고, 밤늦게까지 글을 고치고 또 고쳤다. 그 날이 그녀와의 마지막 여정 중에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꽃과 식물들을 알려주었다. 집을 말끔하게 관리하는 방법이며, 나물 다듬는 법, 빨래를 갤 때 손 다림질로 옷매무새를 잡는 법도 배웠다. 집안 일에는 모든 지혜가 있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의 뽀얀 마나님 손으로 나의 옆머리를 쓸어주던, 예쁘다.. 했던 그녀를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한다.


그녀의 장례 첫날, 잠시 집에 와서, 그녀가 누웠던 침대에서 잠을 잤다. 오늘, 그리고 내일의 웃고 우는 우리의 나날들을 그녀는 이젠 모를 것이다. 하나의 세상이 닫히며, 사라진 관계의 인드라에 오월의 꽃바람이 분다. 그녀가 좋아하는 초여름의 꽃들이 분분하다.  


나의 외할머니,

남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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