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H-AHH 하게 떠나는 고전산책
제갈공명과 융중(隆中) 이야기
융중은 삼국지연의에서 삼국시대의 막을 연 제갈공명(이하 공명)의 유명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가 나온 곳이다.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공명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융중에서 공명은 유비에게 북쪽은 조조, 남쪽은 손권에게 양보하되 서쪽의 형주와 파촉이란 지역을 취해 천하삼분의 형세를 만들라는 계책을 제시했고, 공명의 계책을 받아들인 유비는 그 전까지 몸 하나 편히 뉘일 곳 없던 처지에서 삼국지 위촉오 3국 중 한 나라를 세우게 된다.
융중은 눈 앞이 산으로 막힌 전형적인 산골이다. 공명은 10대 시절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온 이후 유비의 방문 전까지 농사를 짓고 학식을 익히며 은거했다. 융중에서 오롯이 사색하는 시간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수경(水鏡) 선생 사마휘 밑에서 동문수학하며 연을 맺은 인재들과 정보와 생각을 교류하면서 천하의 흐름을 꿰뚫고 삼국정립의 계책을 낼 수 있었다.
창의성을 위한 ‘공간 투자’
우리의 일상 공간도 공명이 은거하던 융중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구글 혁신 및 창의성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프레드릭 G. 페르트가 서울 디지털 포럼에서 발표한 ‘창의성을 일깨우는 전략’ 내용 중 ‘공간 투자’라는 말에 주목했다. 물리적인 공간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 가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였다. 환경이 창의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되니 삶의 터전으로만 생각했던 주택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돌이켜보면 집이라는 곳은 그저 ‘하숙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귀가해서 다시 노트북을 켜고 검색하다 잠드는 곳이 아닌, 심신을 잠시 내려놓고 사색하는 공간, 아내와 지인들 혹은 이웃들과 비정기적으로 정보와 생각을 공유하며 창의성에 영향을 주는 공간에 무게 중심을 두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몇 해 전 예비 신혼집을 찾아 나섰다.
재미있는 옛날 집을 발견했습니다.
재미있는 집이 있는데 보실래요?
계획에 따라 보러 간 집들이 문이 잠겨있거나, 전자키가 고장 났거나, 집주인이 점심을 드시러 멀리 가셨거나 하는 이유로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공인중개사가 건넨 질문이다. ‘재미있는’이라는 말에 꽂혀 찾아간 곳은 대들보가 육송이고 구워서 만든 옛날 벽돌로 만들어진 오래된 한옥이었다. 2013년 서울에 아직 이런 집이 있나 싶을 정도로 고전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어르신이 오래 살던 곳이라 다소 남루해 보여도 희소가치 높은 자재로 쓰여 어쩐지 귀해 보였다.
심한 외풍, 방음 안됨, 벌레 친화적, 바깥에 위치한 화장실 등 옛날 단독주택의 온갖 불편한 점들을 갖고 있어 신혼집으로는 부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집의 원형을 헤치지 않고도 약간의 수리와 가구 배치만으로 불편함을 감수할 멋진 공간으로 재탄생할 거라 확신했다. 관리가 안 된 집을 신혼부부에게 맡기는 거라 임대료는 매우 저렴했고, 가스보일러 공사와 도배·장판은 주인께서 해주기로 하여 기본적인 생활에 대한 걱정은 덜었다. 남은 과제는 앞서 얘기한 창의성을 위한 ‘공간 투자.’
사색 포털 툇마루
먼저 부서진 툇마루가 눈에 띄었다. 전통적인 한옥의 툇마루는 아니었으나 집성목으로 복구하여 마루와 사랑방 앞에 모양을 갖추니 다과와 휴식을 겸할 수 있는 훌륭한 티테이블 겸 의자가 됐다. 비가 오는 날엔 ‘시동을 끄고 30초만 늦게 내려보라’는 한 광고 카피가 절로 떠올랐다. 반복해서 빗방울이 땅을 두드리는 소리는 시끄럽기보다는 되려 생각에 잠기게 한다. 나란히 걸터앉아 차 한 잔과 나누는 대화들로 감성지수 높은 영감(靈感)님을 모시게 됐다.
나와라! 가제트 만능 서재!
옛날 한옥의 작은 방 2개에 문을 떼어냈을 뿐인데 집안에서 가장 큰 공간이 생겼다. 서로가 눈 맞추며 대화하기 적합한 6인용 테이블을 중앙에, 벽면에는 책장을 놓았다. 이 공간은 마루, 서재, 스터디룸 혹은 식당이라고도 부른다.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 온 부부의 안방이 되었다. 에어컨만 틀면 여기가 물 속보다 더 시원하다.
구멍이 뚫려 스티로폼으로 막아놓았던 창문틀은 실리콘을 바르고 블라인드를 설치했더니 감쪽같았다. 도서관 마냥 책들을 쌓아놓고 인터넷 자료도 찾기 위해 인터넷 접속을 시도하다 깜짝 놀랐다. 와이파이 전파가 그 어떤 벽도 뚫는 집인 것이다. 설마 설마 하며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방에도 가봤지만 속된 말로 ‘빵빵했다’. 이거야 말로 옛날 주택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실행의 한마당, 안마당
마당 있는 집의 좋은 점은 포용력이 크다는 것이다. 21㎡ 남짓한 시멘트 바닥에 인조잔디만 깔았을 뿐인데 집은 완전히 새로 태어났고 대화로 오갔거나 머리 속에서 둥둥 떠다니던 아이디어 실행까지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처음 이 집을 발견한 날 결심한 게 있는데, 안마당을 끼고 작은 결혼 행사를 여는 것이다. 마치 전시회 큐레이터처럼 하객들에게 집안 구석구석을 소개하면서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거기에 안마당에서 파티와 어쿠스틱 연주도 곁들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나눈 후 5개월 만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객들도 우리와 같은 동선으로 집을 탐사(?)하고 마당, 툇마루부터 다락방까지 집안 곳곳에 걸터앉아 자정까지 수다를 떨며 성대하지 않은, 소소한 결혼 행사의 막을 내렸다.
결혼 행사에 탄력받아 영화제도 추진했다. 금이 간 안마당 담벼락에 어둠이 드리워지니 흡사 영사 스크린이 연상되었다. 담벼락에 빔프로젝트를 쏘니 영화감독의 꿈을 접은 친구들을 위한 담벼락 영화제를 개최할 수 있었다. 좌석은 바닥과 2개의 툇마루를 합하면 15명까지 수용 가능한 훌륭한 영화관이다.
이 외에도 담벼락을 활용한 프레젠테이션 수행(?), 오픈된 공간 특성을 활용한 플라워 스튜디오와의 전시회 등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실행들이 이어졌다.
고전 주택으로의 첫 번째 산책을 마쳤다. 황새가 아기를 물어오기 전까지는 오늘 하루 일 얘기를 늘어놓고 영감으로 재발견할 수 있도록 영향을 주는 공간, 더 이상 하숙이 아닌 산책하는 마음으로 주거 공간과 공존하려 한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계획대로라면 이 글에 응답한 분을 본 지면에 등장하는 주택으로 초대해야 마땅하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이번엔 먼저 부동산중개소에 “재미있는 집 좀 보여주세요.”라 청하여 살면서 영향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주택을 발견했다.
누군가는 유레카를 욕조에서 외쳤고, 또 누군가는 사과나무에서 외쳤다. 저마다 유레카를 외칠 수 있게 창의성을 키우는 공간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회사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주택이 그런 곳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세월, 누군가의 경험, 그리고 손님들이 안고 오는 이야기들이 외풍을 타고 솔솔 넘어오는 고전 주택. 바로 이 곳.
사라지는 것들을 그리워한 적 있는가? 주거 공간뿐 아니라 자연이란 환경도 공존을 통해 그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을 거라 볼 수 있다. 아, 끝에 단어 3개만 좀 바꿉시다. ‘볼 수 있다’가 아니라 ‘매우 보여진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