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보다 먼, 제삼자보다 가까운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아버지와 함께 달리거나 공을 차거나 하는 장면이 없다. 아버지께서는 과연 아들과 함께한 그렇고 그런 추억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계실까. 한가지 인상적이고 반복적인 장면이 있다면 주말 아침마다 아버지와 함께 대중목욕탕을 찾았던 기억이다.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께서는 남들과 다른 외양이나 걸음걸이를 숨길 수 없는 공간인 대중목욕탕을 이용하는 데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으셨다. 그것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거나 오히려 당당하다거나 하는 시련의 극복과 같은 서사가 아니라 그냥 아무렇지 않은 자연스러움이었다.
덕분에 나는 아버지의 장애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자랐고 가족 이외의 장애인에 대해서도 동정의 시선보다는 ‘저 사람은 그냥 저런 신체, 저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구나’ 정도로 덤덤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장애인에 대한 세상의 인식을 실질적으로 느낀 것은 아버지께서 은퇴 후 낡은 자동차를 새 차로 바꿀 결심을 하셨을 무렵이었다.
아버지의 첫 차는 수동 변속기의 소형차로 왼쪽에 클러치 페달이 있었지만, 오른쪽의 가속 페달을 밟으면 보조장치에 의해 클러치 페달도 함께 밟히는 하반신 장애용 차량이었고 장애 등급에 따른 개별소비세 혜택이 있었다. 두 번째 차는 다행히 클러치가 필요하지 않은 자동 변속기의 중형 LPG 차량이었는데 장애인을 위한 보조장치는 없었지만 첫 차와 마찬가지로 혜택이 적용되었다.
새 차를 고르는 기준으로 경제적인 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버지께서는 이동 편의성과 연비를 감안하여 대형 세단의 LPG 모델을 선택하셨는데, 해당 모델은 아버지의 장애 등급에서 개별소비세 혜택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았다. 이 정도 차량을 구매할 수 있는 경제력이면 지원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공정성의 측면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장애인의 계층 사다리를 따로 지정해 둔 것이 아닌가 하는 반발심이 들었다. 어딜 감히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정상성’을 침범하려 하는가 같은 위험한 의도를 상상하기도 했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혜택을 포기하고 당신의 선택을 고수하셨다. 대형 세단을 탄 이후로는 뒤차의 경적을 듣는 일이 줄었다고 하시며 웃으실 뿐이었다.
UX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디지털 접근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가장 흔한 것으로는 대체 텍스트가 있었다. 이는 시각 장애인이 스크린 리더를 사용할 때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미리 텍스트를 입력해 두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이 비시각장애인처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청각을 통한 정보전달로 대체하는 것인데,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한 측면이 있었다.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보면 장애의 유형에 따라 문제가 되는 감각을 강화해 주거나 ‘정상화’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저 문제가 덜한 다른 감각으로 우회하는 것이 최선이라니.
이런 문제의식은 과거에 열심히 활동했던 의료생활협동조합에서 ‘건강’에 대한 정의를 고민할 때도 비슷했다. 일반적으로 건강이라고 하면 비장애인의 아름답고 튼튼한 몸을 상상하게 되는데, 장애인에게 있어 건강이란 어떤 의미일지 하는 물음이었다.
예를 들어 눈이 하나뿐인 사람에게는 비장애인처럼 보이는 선글라스가 적절한 보조기구인지, 아니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눈을 더 멋있게 보일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액세서리가 필요할지 하는 문제였는데, 우리는 장애인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비장애인처럼 되는 것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한 관점에서 다시 대체 텍스트로 돌아와 보면 시각장애인을 위해서는 시신경을 강화하는 최첨단의 공학이 아니라 그저 곁에서 나즈막이 읽어주는 것이 적정기술이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아버지와 같은 신체장애를 겪는 분들이 비장애인과 같은 수준으로 기능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희망에 기대는 것보다 현실의 불편함을 적정기술로 보조해 주는 것이 ‘정상화’에 보다 가깝지 않을까.
차량의 크기에 따라 세금 혜택 구간을 정해두는 것이 장애인의 삶의 영역에 울타리를 쳐두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장애인은 운전을 하더라도 작은 차만 타면서 다른 운전자들의 신경질을 그대로 감내하라고 몰아세우는 것 같았다. 장애인의 삶과 비장애인의 삶에 제한적인 보조금 따위로 정치적인 경계선을 긋지 않는 것이 곧 일상에서의 보조기구이자 적정기술이 아닐까.
내 가족의 경험만으로 장애인의 삶과 세상의 잣대를 짐작하는 것이 상당히 편협하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안다. 심지어 스스로 그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으니 당사자성을 갖추지 못한 피상적인 이야기들은 본질을 왜곡하기 쉽다. 또한 장애인을 위한 정치와 행정의 고민을 쉽게 비판하는 것 역시 경계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늘 아쉽고 안타까웠으며 장애를 비정상으로, 비장애를 정상으로 간주하는 편견과 무의식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불편한 장애라고 믿는다.
아버지께서 원하셨던 바가 튼튼한 두 다리로 똑바로 걷거나 달릴 수 있는 것일지, 아니면 불편한 다리를 보조할 수 있는 편안하고 두꺼운 쿠션의 신발일지,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당신께서 직접 운전하시며 자식과 손주들을 불편함 없이 여기저기 데려다주고 싶은 내리사랑을 긍정하고 지원하는 것이 할아버지의 삶을 ‘정상화’하는 길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2023년 9월 24일 미디엄에 발행한 원문 링크를 첨부합니다.